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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독재자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를 어떻게 지배했는가30포인트 편역본
냉철한 두뇌, 냉정한 가슴, 검쟁이로 오해받을 만큼의 신중함, 그러한 것이 불과 열아홉의 청년 황제에게 위선의 가면을 씌우라고 가르쳤고, 이후 마지막까지 이를 버리지 못했다._기번
공익을 위하는 지배자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형식상 '이집트 왕의 칭호는 그대로 유지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이집트 민중들을 배려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재물과 보화를 접수한 후 지사체를 대리로 두고 자신은 로마로 귀국했다.
옥타비아누스(기원전 27~기원후 14 재위)는 막 서른한 살이 된 젊은 나이에 카이사르가 남긴 과제를 거의 다 이루어놓은 상태였다. 원로원 역시 그를 견제하려는 의지와 힘을 모두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왕위에 오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말을 조심하고 행동에도 신중을 기했다.
최근 수십 년간 국가의 부패를 계속 지켜봐온 로마 시민들은 '민주주의적 공화제'라는 것이 이른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선진국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로마 시민 역시 현행 제도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음을 옥타비아누스는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은 '질서·평화·안전'을 보장하는 선정과 안정된 통화였기 때문에 그는 이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시책을 먼저 실행했다.
우선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에서 얻은 막대한 재화로 군대를 재정비했다. 전쟁이 종결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50만 군단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병사를 20만 명으로 줄이고 옥타비아누스는 최고사령관에 취임했다. 나머지 30만 명은 귀향시켜 토지를 주고 농업에 종사하게 했다.
또 국가에게 진 개인의 부채를 탕감해 주고 대규모 공공 사업을 시작했다. 그것은 죽은 카이사르가 시도했던 대규모 사회 개혁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관료 조직을 정비해야 했다. 그의 인사로 인해 위대한 행정관 아그리파, 수완 좋은 재정가 마이케나스, 그리고 그의 양아들 티베리우스를 포함하여 몇몇 유능한 장군들이 금방 두각을 나타내며 활약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모두 자산계급(부르주아) 출신이었던 그들에 대해 불평을 해댔다. 옥타비아누스는 귀족 출신의 원로원 가운데 20여 명을 선발하여 정치의 요직을 관장하는 추밀원 의원으로 임명하여 원로원을 통제하게 했다. 그리하여 평민을 주축으로 하는 민회가 열리는 횟수도 줄어들면서 옥타비아누스를 거스르려는 시도도 더 이상 없었다.
그는 열세 번이나 연속으로 집정관에 입후보했으며 그때마다 모두 당선되었다. 기원전 29년부터는 '임페라토르(최고사령관, 개선장군)' 에 덧붙여 '프린키페스(제1인자, 제1시민) 의 칭호를 받았다.
기원전 27년에는 옥타비아누스와 원로원이 연극을 준비하여 민중들 앞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옥타비아누스는 돌연 모든 권력을 원로원에 반환하며 다시 예전 공화제로의 복귀를 선언하고 사퇴를 표명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일단 총사직을 한 뒤 모든 권력을 다시 옥타비아누스에게 위양하고 로마의 전권을 장악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고는 '아우구스투스(존엄자)'의 칭호를 바쳤다. 물론 여기에 임페리움(지배자)이라는 칭호가 따라붙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이른바 '제왕'을 의미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내가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이라는 태도를 취하며 그들의 간청을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자부심 높은 모든 원로원 의원 중 누구 한 사람의 반발도 없이 오랫동안 유지해 왔던 보수 공화파의 '임페라토르(최고사령관)'가 사라졌음을 전 로마에 선언하고 500년 만에 정식 '독재관'이 탄생했다.
황제로 불린 독재관
그러나 독재관 아우구스투스는 여전히 소박한 생활을 했다. 자신의 집을 왕궁으로 개조하지도 않고 집무실과 서재 두 칸만 사용했다. 그나마도 화재로 저택이 모두 불타버리자 원래대로 재건하여 다시 그곳에 살았다.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두 아들 모두 스무 살의 나이에 장군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특히 드루수스를 총애했는데 아쉽게도 그는 전투 중에 낙마로 사망하고 말았다. 드루수스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던 아우구스투스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티베리우스를 제치고 딸 율리아가 아들을 낳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손자를 후계자로 지목할 계획이었다.
성격이 활달하고 독설을 즐기며 색정이 넘치는 율리아를 아우구스투스는 총애했다. 그녀가 열네 살이 되자 누이 옥타비아의 아들 마르켈루스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남편이 일찍 죽자 율리아는 닥치는 대로 남자들을 상대했고 자신의 정사를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녔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명장 마르쿠스 아그리파에게 딸을 맡겼다. 아그리파에게는 조강지처가 있었지만 황제의 권한으로 이혼을 명령했고 마흔두 살의 아그리파와 열여덟 살의 율리아를 결혼시켰다. 그리하여 그 두 사람 사이에서 다섯 명의 자녀가 태어났는데 8년 후에 아그리파가 사망하자 율리아는 또다시 남성 편력에 빠져들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녀에게 세 번째 결혼을 명령했다. 이번 상대는 티베리우스였다. 그런데 티베리우스의 아내는 아그리파의 딸 빕사니아였기 때문에 율리아는 티베리우스의 장모가 되는 셈이었는데도 황제는 강제로 결혼을 시켰다.
그러나 기상천외한 악처 기질을 발휘하는 율리아를 참을 수 없었던 티베리우스는 그리스의 로도스 섬으로 도피했으며 율리아는 또다시 난잡한 생활에 빠져들었다. 게다가 두 아들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는 요절하고 말았다.
언젠가는 두 손자에게 국사를 맡기려고 생각하고 있던 아우구스투스는 낙담했다. 결국 그는 율리아를 추방하고 티베리우스를 다시 불러들여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군대의 지휘권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노년의 아우구스투스는 시종 류머티즘과 감기에 시달렸으며 점점 의심이 많아지면서 성격도 잔혹해졌다. 있지도 않은 음모를 의심하며 '친위대'라는 호위부대를 창설했지만 이것이 제정 로마의 화근이 되고 말았다.
율리아는 딸을 남기고 유형지의 고도에서 죽어갔는데, 엄마와 같은 이름을 가졌던 그녀의 딸 율리아 또한 엄마와 똑같은 행실의 여인으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할아버지인 황제는 이 손녀딸도 유배 보내야 했다.
개인적인 삶이 절망에 잠겨 있었던 아우구스투스는 공무에 대한 책임만으로 계속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14년, 그는 76세가 되던 해 어느 날 폐렴에 걸린 몸을 이끌고 집무실에 앉아 모든 것을 법령으로 서명하고 모든 편지에 답장을 써놓은 후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다.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는 2세기의 '두 안토니누스 황제 시대'(15대 황제 티투스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 재위),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161~180 재위))에 제국의 판도는 군사력에 있었다고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초대 아우구스투스 대제 이후 여러 황제의 정책이나 지침, 행동은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그 이전의 포에니 전쟁,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일까. 기번이 살았던 18세기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 이전의 '역사'는 이른바 상식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기번의 분석과 같이 두 안토니누스 황제가 등장하기 이전의 제정 로마 시대에 대해서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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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입니다. 30포인트 편역본은 한국어 편역이고 원전은 기번의 영문입니다. 섞어 인용하면 사실관계가 어긋납니다. 인물·관계 자료는 편역본 계통에서만 뽑았습니다.
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입니다. 괄호를 내용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포인트 한 장이 약 1만 자, 5천 토큰입니다. 어느 AI 창에도 그냥 들어갑니다. 잘라 붙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있습니다. 포인트 01·02 본문 45건을 사료와 대조해 심각한 오류 6건을 찾았습니다. 전투 승패가 뒤집힌 서술이 두 장에 하나꼴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기준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