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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에 길이 남을 공방전

콘스탄티노플은 어떻게 함락되었는가
30포인트 편역본
오랜 교섭 끝에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자신의 명예와 세간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성을 개방할 수 없었고 마침내 옥쇄를 결의했다. — 기번

동방정교에 대한 유럽 제국의 외면

15세기 중반에는 콘스탄티노플 근교를 제외한 발칸 반도소아시아 일대 모두가 이슬람의 영토였다. 로마 제국은 2,200년에 이르는 긴 역사상 처음으로 강력한 적대세력에 의해 포위되었다.
동로마 제국이슬람 세력에 의해 완전히 포위될 때까지 수수방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역대 황제들은 주변의 유럽 국가들에게 오스만투르크(이슬람 왕조, 오스만 제국)의 위협에 대해 호소하며 방위를 위한 지원을 요구했었다.
십자군을 물리친 오스만투르크 군은 그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다행히 함락은 면했지만 이에 놀란 마누엘 2세(1391~1425 재위) 황제는 서유럽 제국으로 떠나 마침내는 잉글랜드 섬까지 건너가서 당시의 영국 국왕 헨리 4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각 나라 국왕들은 동로마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며 깍듯이 대했지만 중요한 군사원조 요청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반응을 내비치지 않았다. 이때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하나같이 마누엘 2세 황제가 동방정교(그리스 정교 혹은 정교)를 버리면 원조할 뜻을 밝혔다고 한다.
1054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대분열을 겪은 동방정교는 이콘을 숭상하는 등 신비주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같은 기독교이지만 가톨릭은 이들을 이교도로 여기고는 개종하지 않으면 이슬람 세력에 의해 멸망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마누엘 2세 황제는 끝까지 동방정교를 고수했고, 유럽 각국의 원조를 얻어내지 못했다.
황제가 실의에 빠져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그해 1402년에 오스만투르크는 중앙아시아의 티무르 제국에 의해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때 파병했다면 오스만투르크를 섬멸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후세 역사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러나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동로마 제국에게는 더 이상 병사를 보낼 전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이 수수방관하고 있는 동안 오스만 제국은 전패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서 이전보다 더 강력한 세력을 얻게 되었다. 1453년에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기 위해 출발했다. 그때 지휘봉을 잡은 것이 메메트 2세(1444~1446, 1451~1481 재위)였고, 그는 스물한 살의 술탄이었다.

오스만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 공략

크게 보면 콘스탄티노플은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 두 변은 마르마라해와 항구에 면해 있었고 육지 쪽의 또 한 변은 길이 10킬로미터에 이르는 이중 성벽과 깊이 30미터나 되는 깊은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바다에서 이곳을 공략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오스만투르크 군은 육지의 방위 라인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이에 대비하여 당시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1449~1453 재위)는 특별히 취약한 장소 몇 곳에 지휘관을 두고 자신은 외벽 수비에 임했다.
성안에 머물던 처음 며칠 동안 로마 병사들은 종종 성벽 바깥으로 나가 오스만투르크 군과 칼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병력이 스무 배가 넘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 이후부터는 성안에서 투석기로 공격하면서 외벽 방비에 전념했다.
"그들은 결국 수비로 전환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적을 두려워해서가 아니었다. 분명 동로마 제국은 패기가 짙었지만 이때만은 별개였다. 제도 공방전에서 황제는 영웅의 이름에 걸맞게 행동했으며 또 병사들에게도 고대 로마인의 용기를 되찾아주었다. 또 외국에서 달려온 약간의 원군도 기사도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 기번
기번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들의 사기는 충천해 있었지만 오스만투르크의 전력은 병사의 수와 무기의 질을 비롯하여 모든 면에서 제국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 공략전에서 나타난 특징은 신·구 양 병기가 병용되었다는 점이다. 이슬람교도(중국인이라는 설도 있다)가 화약을 발명함으로써 머스킷(라이플 총의 전신으로 16세기에 발명된 구경이 크고 무거운 보병총) 총과 대포가 발명되었는데 가격이 비싸서 동로마 제국에서는 아직 주력 병기로 사용되지 못했고 게다가 화약도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투석기나 활 등이 병용된 것이다.
기번에 따르면 당시 머스킷 종의 탄환은 호두 정도 크기의 납으로 만들어졌으며, 대열의 밀집도나 화약의 양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한 발의 위력은 갑옷 입은 여러 병사의 가슴과 몸을 한꺼번에 관통할 정도였다고 한다.
외벽 위에서는 적을 향해 끊임없이 활과 창, 그리고 돌멩이들이 날아왔고 구령에 맞추어 머스킷 종을 쏘아댔다. 그에 반해 오스만투르크 군은 그것의 몇 배나 되는 규모로 총을 쏘고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폭음과 함께 대포를 쏘아댔다.
동로마 군 측에 대포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설령 있었다고 해도 성벽 위에 배치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발포의 충격으로 노후된 성벽이 무너져 내릴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견 견고해 보이는 성벽이 사실은 노후된 상태였다는 것을 오스만투르크 군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성벽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찾아내 대포 열네 개를 한꺼번에 조준하여 일제히 발포했다. 핑음과 함께 천지가 진동하면서 성벽이 와해되었고 성 로마누스 교회의 탑이 무너졌다.
오스만투르크 군 병사들은 대량의 흙과 모래로 해자를 메워 붕괴된 부분을 통과해 성안으로 침투하려 했다. 그러나 동로마 군의 격렬한 저항과 더불어 날이 어두워지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다음날 새벽 메메트 2세의 눈앞에 놀랄 만한 광경이 펼쳐졌다. 메워져 있어야 할 해자가 원상 복구되었고 성 로마누스 교회의 탑이 다시 우뚝 솟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놀라움과 낙담을 감추지 못한 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설령 3만 7천 명의 예언자가 예언했다 하더라도 이 정도의 일이 하룻밤 사이에 이교도의 손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해전에서 완패한 오스만투르크 군

유럽 제국의 원조는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동로마 황제는 에게해의 섬들과 시칠리아 등에 최소한의 필요한 물자를 공급해 달라고 요구했다. 황제 소유의 배 한 척과 제노바 소유의 네 척을 합해 다섯 척의 대형 선박에는 병사와 수병, 그리고 밀과 야채 등이 만재되어 항구에 정박해 있었다. 그러나 지중해에 북풍이 몰아쳐 출항할 수 없었다.
시시각각 전해오는 소식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플의 상황은 분명 악화되어가고 있었다. 출항할 수 없다는 사실에 답답함을 느끼면서 며칠이 지난 후 겨우 남쪽으로부터 미풍이 불어왔고 둘째 날에는 미풍이 강한 질풍으로 바뀌었다. 선대는 곧바로 출항했지만 이미 이때에 보스포루스 해협 입구를 300척이나 되는 오스만투르크 함대가 초승달 모양으로 봉쇄하고 있었다. 그들은 만전의 태세를 갖추고 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섯 척에 불과한 동로마 제국의 함대는 씩씩하게 오스만투르크 함대를 향해 돌진해 나갔다. 동로마 제국군과 오스만투르크 군의 진영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의 양 해안에도 무수한 구경꾼들이 잔뜩 몰려와서 마른 침을 삼키며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일견 중과부적의 전투, 즉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오스만투르크 군의 승리가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오스만투르크 함대는 메메트 2세가 단시간에 완성시킨 함대였다. 게다가 이슬람 세력은 어느 시대에나 그러했듯 해전에 약했다. 그들은 "신이 자신들에게 육지를 주셨다면 바다는 이교도들에게 맡기셨다"라고 말하곤 했다.
오스만투르크 함대는 대형 갤리선이 18척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갑판도 없는 작고 초라한 배에 대포도 없이 병사들만 가득 타고 있을 뿐이었다.
이슬람 제국에는 사막 민족이 많았으므로, 바다를 처음 본 병사들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바다로 출병되었으니 제 기량을 발휘할 리 없었다. 게다가 파도에 이리저리 밀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이었다.
그에 비해 동로마 군의 함대 다섯 척은 모두 튼튼한 대형선박이었다. 숙련된 타수가 배를 조종하고 있었으며 해전에 익숙한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전사들이 승선해 있었다. 앞길을 가로막는 오스만투르크 함대 따위는 가볍게 물리쳤고, 근접해 오는 배에 기름을 끼얹어 불을 질러 쫓아냈다. 도중에 배 한 척이 거의 제압당할 뻔했으나 그 직전에 요선에 의해 구조되었다.
메메트 2세는 오스만투르크 함대가 형편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무모하게 말을 달려 바다 속으로 뛰어들려 했다고 하니 그 분노와 당황스러움을 짐작할 만하다.
오스만투르크 함대는 동로마 군의 함대에 세 차례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거꾸로 제독의 눈에 부상을 입는 등 참담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실제로 이 전투에 참가한 병사에게 들었다고 하는 프란자라는 인물의 증언(기번은 그의 증언이 믿기 힘들다고 말하고 있지만)에 따르면 이날 하루에만 오스만투르크 군의 사망자가 1만 2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파멸적인 타격을 입은 오스만투르크 함대가 도망치는 동안 다섯 척의 함대는 의기양양하게 아무런 피해 없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하여 항구에 유유히 닻을 내렸다. 동로마 군 병사들은 성벽 위에서 환호성을 지르며 오스만투르크의 해군을 완전히 분쇄했다고 호언했다. 한편 오스만투르크 함대의 제독은 부상에 따른 심한 통증이 없었다면 참패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이 제독은 메메트 2세의 분노를 사서 태형에 처해진 후에 재산 몰수와 유형에 처해졌다.

육지로 수송한 선박과 군수품

해전에서 압승을 거둔 뒤 물자를 보급받은 동로마 제국 사람들은 희망과 사기를 되찾았다. 제노바 등 근린 해양제국들이 구원의 손길을 조금만 뻗쳐준다면 냉담한 유럽국의 도움 없이도 이 도시를 존속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끓어올랐다.
그러나 이때 메메트 2세는 전대미문의 기책을 실행에 옮길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 계획이란 경량의 선박과 군수품을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항구의 안쪽 깊숙이 위치한 육지로 수송하여 기습하려는 계획이었다.
그 거리는 약 15킬로미터였다. 도로는 기복이 심했고 잡초가 무성했다. 게다가 그곳을 무사히 통과하는 데는 그 땅을 소유하고 있는 제노바인에게 달려 있었다.
오스만투르크 군에게는 다행이었던 것이 제노바인이 본질적으로 상인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동로마 제국 측에 배를 보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사 수완으로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충성보다는 신변 안전이 더 중요했던 그들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자랑하는 오스만투르크 군을 방해할 리가 없었다.
무서운 기세로 풀들이 베어지고 평평해진 땅 위에는 양의 지방을 흠뻑 바른 두꺼운 판자가 죽 깔렸다. 이리하여 불과 하룻밤 사이에 오스만투르크 함대는 산을 넘어 평지로 진격했고 경사면을 기어올라 마침내 항구의 안쪽 깊숙한 곳에서 배를 띄웠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이번에는 동로마 제국의 병사들이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던 항구에 80척이나 되는 갤리선이 일렬로 죽 늘어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항구 구석 쪽으로 진입한 오스만투르크 군은 항구의 가장 좁은 지점에 뗏목을 띄워 폭 2.5미터 크기의 부두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다리 위에 대포 하나를 준비해 두고 갤리선 80척을 상륙하기 용이한 지점으로 진입시켰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상륙 지점은 예전에 야만족이 이 도시를 지배할 때 로마 군이 급습했던 곳과 같은 장소였다.
물론 동로마 제국의 군대가 이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임시 교각 공사는 물론 갤리선이 접근할 때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저지했다. 그러나 오스만투르크 군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동로마 측은 야간습격으로 갤리선을 불태워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오스만투르크 군의 경계는 삼엄했고 한밤중에 잠입하여 그들의 선단으로 접근하려 했던 동로마 군 병사 40명은 전원 체포되어 공개 처형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황제는 오스만투르크 군의 포로 260명의 목을 쳐서 그 목을 성벽 위에 죽 늘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오스만투르크 군은 공격의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함락 직전의 콘스탄티노플

성을 지킨 지 40일이 지나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 병사의 수는 날로 줄어들었으며 피로 누적으로 인해 체력적인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성벽도 오스만투르크 군의 강력한 화력에 의해 구멍이 뚫리고 성 로마누스 문 근처에 있는 네 개의 탑은 완전히 무너졌다.
이쯤 되자 황제는 병사들의 반란을 우려하여 그들에게 급료를 네 배로 올려주기로 약속하고 교회로부터 돈을 빌렸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초래했다. 신성모독적인 황제의 처신은 오히려 불만분자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제노바와 베네치아에서 달려온 원군들은 지휘권을 놓고 서로 다투었고 황제의 측근들도 서로에게 '배신자', '겁쟁이'라는 비난을 서슴치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오스만투르크의 사자가 항복하라는 권고를 가지고 동로마 군을 방문했다. 공격하는 측인 메메트 2세도 더 이상의 유혈은 피하려는 생각이었고 가능한 한 파괴하지 않고 이 도시를 손에 넣기를 원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1세는 "나는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 나는 이 제국과 운명을 함께하겠다"라고 선언하며 사절을 내쫓아버렸다.
메메트 2세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는 점성술을 통해 운명의 총공격일을 5월 29일로 정했다. 그리고 그전에 병사들에게 휴가를 주었다. 오스만투르크 군 병사들은 기도와 목욕으로 심신을 정결히 하고 다음날 저녁까지 단식을 했다. 또 이슬람교의 수도승이 진영을 방문하여 병사들에게 "성전에 몸을 바친 자에게는 강이 흐르는 낙원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곳에서는 검은 눈동자를 가진 처녀에게 안긴 채 영원한 젊음을 향유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순교에 대해 설파했다.
메메트 2세는 병사들에게 승리할 경우 봉급을 두 배로 올려줄 것을 약속했다. 여러 가지 격려책으로 인해 전투에 대한 의지는 더욱 불타올랐다. "신뿐은 신이다. 알라 이외의 신은 없다. 마호메트는 신의 사자이다"라는 그들의 씩씩한 외침이 콘스탄티노플의 성내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5월 26일이 되자 메메트 2세로부터 "3일 후에 총공격을 개시한다"는 내용이 전달되었다. 그 다음날이 되자 황제는 측근들을 궁전으로 불러 마지막 연설을 한 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이렇게 용서를 구했다.
"짐이 그대들에게 상처 준 일이 있다면 용서해 주기 바라오."
그 말을 듣고 측근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5월 29일 새벽이 밝아옴과 동시에 오스만투르크 군의 총공격이 육해 양쪽에서 시작되었다.
오스만투르크 군의 최전선에는 약탈을 기도하는 오합지졸의 민중과 순교에 뛰어든 광신적인 사람들이 배치되었다. 그들은 성벽을 향해 돌진했지만 대부분 동로마 제국의 병사들에 의해 사살되었다.
오스만투르크 군은 수적으로나 화력으로나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공격수가 없었다. 전투가 개시된 지 두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는 동로마 제국이 우세한 듯 보였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오스만투르크 군이 자랑하는 무적의 정예군인 '예니체리'가 돌격해 오기 전이었다.
육상, 갤리선, 임시 교각 위에 놓여 있던 모든 거포트에서 성벽을 향해 탄환이 발사되었고 군영과 성곽이 순식간에 포연에 휩싸였다. 항복을 하느냐, 함락되느냐, 두 가지 외에는 더 이상 포연을 거둘 방법이 없었다.
메메트 2세는 1만 명의 친위대에게 둘러싸여 말 위에서 전투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도 측에 마지막 선언을 할 순간을 기다렸다. 실로 전국의 추이는 메메트 2세의 판단과 지령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기번은 이 전투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화나 고대의 영웅들이 보여준 일 대 일 겨루기와 멋진 전술이 전개되었다면 재미도 있고 친근감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총공격은 유혈과 공포, 혼란 이외에 도대체 무엇이 더 있을 수 있는가."

꿈처럼 사라진 영원의 제국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 확정된 순간은 제노바 출신 사령관인 유스티니아니가 팔에 총을 맞았을 때라고 한다. 수도 방위의 중추였던 그는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심한 통증에 동요되어 전의를 상실했고 급기야 적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것을 본 황제는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이렇게 말했다.
"상처는 깊지 않다. 위기가 닥쳐오고 있는 지금 너의 지휘는 필요불가결하다. 이곳에 머물라!"
그러나 그는 황제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도망쳐버렸다. 그가 달아나는 것을 본 많은 구원군들도 그를 따라 전선을 이탈했다. 그 결과 동로마 제국 병사의 수는 오스만투르크 군 병사의 100분의 1 정도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난공불락이던 성벽은 이미 자갈산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군은 거세게 밀어닥치는 오스만투르크 군에게 밀려 성 안으로 후퇴했다.
"짐의 목을 칠 기독교도는 한 사람도 없는 것인가!"
황제의 비통한 울부짖음이 성내에 울려 퍼졌다. 그는 무엇보다도 산 채로 이슬람교도의 손에 넘겨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이미 근위병은 전멸했고 그의 말에 대답해 줄 사람조차 없었다. 황제는 최후의 수단으로 용포인 자의를 벗어 던지고 전투의 최전선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는 누군가에 의해 가격당한 채 쓰러져서 미지의 전사자들과 함께 매장당했다.
황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순간 동로마는 완전히 무너졌고 시민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성 소피아 성당으로 몰려갔다. 한 시간 만에 성당 전체가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누군가가 한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한 남자가 "오스만투르크 군은 제국의 수도에 돌입하여 성 소피아 성당 앞 광장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주랑이 있는 곳까지 진격했지만 여기까지 오자 한 손에 검을 든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예언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믿었던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갈라진 성문 틈으로 밀어닥친 오스만투르크 군은 항만으로 향한 문을 돌파해 들어온 아군과 합류하여 성 소피아 성당을 포위했다. 그들은 삽으로 문을 부수고 성당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들은 성내에서 시민을 2천 명 이상 살해하고 노예로 쓸 만한 사람들을 가려낸 후 연거푸 약탈을 자행했다.
"왕이 살던 궁전에는 여기저기 거미줄이 쳐지고 아프라시아브의 망루에는 올빼미가 우나나."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하여 자갈산이 된 동로마 제국의 수도를 둘러본 메메트 2세의 입에서는 영화로움의 덧없음을 노래하는 시 한 구절이 튀어나왔다.
이렇게 해서 2200년간 이어져온 로마 제국은 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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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인트의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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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것

다른 책입니다. 30포인트 편역본은 한국어 편역이고 원전은 기번의 영문입니다. 섞어 인용하면 사실관계가 어긋납니다. 인물·관계 자료는 편역본 계통에서만 뽑았습니다.
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입니다. 괄호를 내용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포인트 한 장이 약 1만 자, 5천 토큰입니다. 어느 AI 창에도 그냥 들어갑니다. 잘라 붙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있습니다. 포인트 01·02 본문 45건을 사료와 대조해 심각한 오류 6건을 찾았습니다. 전투 승패가 뒤집힌 서술이 두 장에 하나꼴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기준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