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 4
제3차 포에니 전쟁
로마는 어떻게 아프리카를 지배하게 되었는가30포인트 편역본
해상 지배권과 막대한 부를 걸고 치러진 전투
제3차 포에니 전쟁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로마에게는 에스파냐, 아프리카, 그리고 지중해의 해상 지배권에 동반되는 막대한 권력과 부가 굴러들어온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된 지 1년 후에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합친 지역이 로마의 제1속주가 되었고 아테나이(아테네)와 스파르타만이 가까스로 약간의 자치권을 얻는 데 그쳤다. 그리스 문명이 긴 세월에 걸쳐 구축한 많은 문화유산과 다수의 지식인들도 로마로 보내졌다.
이런 상황에서 카르타고를 계속 도발한 것은 자마의 전투 영웅 중 한 사람인 누미디아의 왕 마시니사였다. 전후 그는 선조 대대로 내려온 땅뿐만 아니라 모든 카르타고 땅을 침략하며 약탈을 일삼았다. 카르타고는 이러한 횡포에 대해 여러 번 로마에 호소했지만 로마는 이를 무시했다.
마시니사는 '고대 최대의 괴물'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여든여덟의 나이에 기마군단을 직접 지휘했으며 아흔 살까지 집요하게 카르타고를 괴롭혔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아버지에게 복종하고 있던 왕자들이 그가 어느덧 노년에 접어들자 왕권 계승을 놓고 서로 반목하게 되면서 카르타고와 뒷거래를 시작했다.
기원전 150년 로마에 대한 배상금을 모두 지불한 카르타고는 더 이상 참지 않고 일거에 마시니사를 공격했다.
몇몇 작은 전투에서 이긴 하스드루발에 대항하여 백발의 마시니사는 안장도 얹지 않은 말에 올라타 진두지휘를 했지만 결국 승패는 가려지지 않았다. 양군은 마침 그곳에 와 있던 로마의 장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소 스키피오)에게 조정을 요청했다. 그러나 교섭은 결렬되었고 더 이상 회복은 불가능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때 로마에서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던 것은 감찰관 카토였다. 카토는 논제가 무엇이건 간에 "고로, 카르타고를 쳐부수어야 한다"라는 말로 연설을 끝맺을 만큼 호전론자였다.
기원전 149년,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기 위한 제3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이미 카르타고 외곽에 8만의 로마 육군이 대기하고 있었으며 바다에는 이에 대응하여 함대가 정박해 있었다.
반면 카르타고는 패전조약의 해군 보유 금지 조항에 의해 해군이 전무했으며, 얼마 되지 않은 육군도 마시니사에게 대패한 후 내륙에 갇혀 있었다. 게다가 시민들이 손에 들고 싸울 무기조차 없었다. 원군을 요청하려 해도 주변의 도시는 이미 로마에 항복해 버린 상황이었다.
로마는 '전 주민의 퇴거와 카르타고 시를 완전히 파괴할 것'을 요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철저항전'을 외치며 봉기했다. 노예를 포함한 모든 시민들이 온갖 생활용기로 무장하고 집들을 성채화했으며 필사적인 노력으로 방패 8천 개, 검 1만 8천 개, 창 3만 개, 온갖 투석기 수천 개, 나아가 배 120척을 만들었다.
로마는 자국과 동맹국 군단 등을 모두 합쳐 8만의 군이 카르타고 시를 포위하여 진군했다. 그들은 성문에 도착하기 전까지 '무혈입성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 다음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쫓아내고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도시를 약탈하면 끝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게다가 성벽 앞에 돌로 쌓은 보루가 구축되어 있어 로마 군은 투석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성 위에서 큰 돌들이 무수히 쏟아져 떨어지면서 로마 병사들은 하나둘 쓰러져 갔다. 대열이 흩어지자 카르타고의 보병대가 습격하여 로마 군은 교외의 진지로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그곳까지 카르타고 기병대가 추격하여 공격하는 바람에 로마 군은 도망치느라 우왕좌왕하게 되었다.
여름이 되자 로마의 장병들은 자신들이 익숙하지 않은 적지에서 전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카르타고 시의 남쪽에 펼쳐진 호수의 고온다습한 습지에서 야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군 장병들은 역병에 걸려 하나둘 쓰러져 갔다. 악취를 뿜어내는 호수를 빠져나와 바다 쪽으로 배와 군단을 이동시켰지만 조수와 바람의 흐름을 숙지하고 있는 카르타고 군이 배에 불을 질러 로마 함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로마 군이 바다와 육지에서 패배한 것은 로마의 맹우였던 마시니사의 기병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변환에 능숙한 기병이 없었기 때문에 카르타고는 로마 군의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배후에서 계속 교란시켰다.
이 시점에서 로마는 두 가지 결단을 내렸다. 일단 결별했던 노왕 마시니사에게 다시 한 번 원조를 요청하기로 정하고, 마시니사가 경외해 마지않는 로마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대 스키피오)의 양손자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소 스키피오)가 그것을 부탁하도록 했다.
그러나 스키피오가 누미디아로 부임해 가기 바로 직전에 마시니사는 세상을 떠나고 남겨진 왕자들 사이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장남에게 왕위를 계승하고 차남에게는 외교권을, 막내에게는 사법권을 장악하게 함으로써 형제 간의 분쟁을 해결하고 각자의 수완을 잘 이용하여 카르타고 군의 내부 분열을 일으켰다.
그 가장 큰 성과는 카르타고 기병대를 통솔하는 장군에게 누미디아 군의 위협을 넌지시 알리면서 물품으로 매수하여 그 덕분에 하스드루발의 세력이 반감된 것이었다.
일단 로마로 돌아온 스키피오는 다음해에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규정 연령보다 여섯 살이나 적었지만 시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로 결정된 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임기는 통상적인 1년이 아니라 '카르타고와의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였다.
그해 봄,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시를 포위했고, 카르타고 측은 하스드루발을 내륙부에서 불러들여 결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함선 50척으로 맞은 카르타고의 최후
스키피오는 거대 토목 공사를 착안해 내어 그 공사가 완료된 후에 적의 보급로를 완전 차단하는 데까지 자신의 역량을 발휘했다.
카르타고 시는 이미 삼중의 성벽을 구축하여 로마 군의 침입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그 외측을 모두 둘러싼 거대한 성벽을 구축하여 시와 내륙 간의 교통을 완전히 차단했다. 내륙 각 지역에서 공수되는 식량을 차단하는 병량치표 공세였다.
이에 대해 하스드루발은 야만적인 행위로 전의를 호소했다. 로마인 포로를 성벽 위로 끌어내 고문을 한 뒤 땅 아래로 던져 죽인 것이다. 이를 본 로마 군의 사기는 오히려 높아졌다. 또 '너무 지나치다'고 항의하는 카르타고 시민마저 살해하는 바람에 오히려 시민들의 단결에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스키피오는 '스키피오 제방'이라는 이름으로 현재도 일부가 남아 있는, 전체 길이 720미터의 해상 제방을 구축했다. 이 제방은 카르타고 시의 동남부에 위치한 자마(지금의 튀니스 남쪽) 지역과 그 남서쪽으로 길게 뻗은 테니아 지역을 해상에서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 구석에 있는, 카르타고 시의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업 항과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군항을 봉쇄하는 장대한 공사였다.
거대한 돌을 1만 9천 개나 실어 날라 조성한 제방 위에서 보병 2개 군단이 전투하는 대대적인 작전을 펼치기 위한 계획이었다.
처음에는 이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던 카르타고 시민들은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에 대항하기 위해 같은 규모의 장대한 계획 두 가지를 세웠다. 하나는 낡은 목재와 금속으로 함선을 건조하는 것과 또 하나는 로마가 구축한 '스키피오 제방' 북쪽의 군항에서 직접 바다로 출항할 수 있도록 수로를 파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작업을 비밀리에 진행하여 마침내 소형 군선 50척과 수로를 완성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이후 50년 만에 카르타고 함대는 바다 저편의 대로마 해군을 목표로 과감하게 해전을 감행했다. 거대한 로마 전함과 일 대 일로 맞닥뜨리면 곧바로 침몰할 것이기 때문에 좁은 범위에서 요리조리 종횡으로 헤치고 나아갔다.
그날은 승패가 판가름 나지 않은 채 밤을 맞이했다. 카르타고 함대 50척 모두 군항으로 돌아왔고 해전은 다음날까지 이어질 것처럼 보였다.
카르타고 함대를 격파한 것은 로마 함대가 아니라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의 소함대였다. 카르타고와 같이 '바다 민족'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그들은 로마인들이 상상도 못할 전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바닷속에 긴 쇠사슬을 단 닻을 내리고 그대로 카르타고의 배로 돌진하여 배의 중심부를 파내듯이 도려내 침몰시키는 전법이었다. 이를 본 로마 함대도 그와 똑같은 전술을 사용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겨우 군항으로 도망치듯 살아 돌아온 소수의 카르타고 함대들은 거의 전의를 상실했다.
이 '50척 함대'의 도전은 해양왕국인 카르타고 최후의 해전이 되었고, 그 장거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해전이 있던 다음날부터 로마 군은 공성병기를 가지고 '스키피오 제방'을 건너 자마 포대를 공격했다. 카르타고 군도 필사적으로 수비하여 격렬한 사투가 되풀이되었다.
이 전투에서 결말을 낸 것은 스키피오의 화공이었다. 스키피오는 무수한 불화살과 불창을 성벽으로 던져 수비병을 쫓아내고 자마 포대를 점거했다.
카르타고 시민은 기원전 147년 여름 막바지의 자마 점거 이후 다음해인 기원전 146년 봄까지 견뎌냈다. 그러나 마침내 자마의 로마 군은 중앙 광장으로 진군을 개시했다.
로마에 대한 항전을 시작할 당시 카르타고 시민은 해방 노예를 포함하여 20만 명이었다. 그러나 3년간의 전투와 기아로 절반은 죽고 이 최후 결전의 날을 맞이한 것은 나머지의 절반인 5만 명이었다.
카르타고 시민은 불화살 공격을 쉴 새 없이 펼쳤고, 로마 군은 보병끼리 어깨를 맞대고 방패를 머리 위로 들어올려 한 걸음씩 다가갔다. 최후의 진공에서는 기마 군단까지 시가전에 투입했지만 그 때문에 시궁창에 카르타고인의 시체를, 개중에는 산 사람까지 던져 메우고 그 위로 진군했다.
카르타고 시민 5만 명은 비르사의 언덕 정상에 있는 거대한 신전까지 추격당한 끝에 결국 항복했다. 그중에는 로마에서 카르타고로 도망간 병사 900명도 섞여 있었다. 스키피오는 이들을 용서하지 않고 대신전의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추격해 올라갔고, 궁지에 몰린 그들은 죽기를 결심하고 스스로 신전에 불을 질렀다.
이때 하스드루발은 항복하여 목숨을 건졌지만 그의 아내는 스키피오를 향해 "고결한 적!"이라고 소리치는 한편 남편을 향해 "겁쟁이 배신자!"라는 경멸의 말을 내뱉고는 아이들과 함께 불 속으로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그 후 17일간에 걸쳐 로마 군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약탈한 뒤 카르타고를 불살라버렸다. 그리하여 700년에 걸쳐 대제국의 수도였고 문화의 중심이기도 했던 카르타고 시는 완전히 소멸되었다. 나아가 모든 영토는 철저히 파괴되었고 5만 명의 생존자는 노예로 팔려갔다.
이제 카르타고의 모든 영토는 로마의 새로운 속주로서 '아프리카'라고 불리게 되었다.
등장 객체
이 포인트의 관계망
이 대목에 나온 관계 12건입니다. 점을 끌어 옮기고 휠로 확대할 수 있습니다.관계가 달린 것만 그립니다. 이름만 나온 인물·지명은 아래 목록에 있습니다.자주 묻는 것
다른 책입니다. 30포인트 편역본은 한국어 편역이고 원전은 기번의 영문입니다. 섞어 인용하면 사실관계가 어긋납니다. 인물·관계 자료는 편역본 계통에서만 뽑았습니다.
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입니다. 괄호를 내용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포인트 한 장이 약 1만 자, 5천 토큰입니다. 어느 AI 창에도 그냥 들어갑니다. 잘라 붙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있습니다. 포인트 01·02 본문 45건을 사료와 대조해 심각한 오류 6건을 찾았습니다. 전투 승패가 뒤집힌 서술이 두 장에 하나꼴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기준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