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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와 원로원의 대결

카이사르는 왜 암살되었는가
30포인트 편역본
카이사르는 부와 명예를 원없이 누렸지만 총애하던 친구들은 대부분 그를 음모하는 자들 편에 섰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권력을 과시함으로써 비운을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왕'이라는 칭호에 대한 반발감이 로마인의 마음을 부추겨 마침내 카이사르는 생명을 빼앗기기에 이르렀다.
기번

카이사르의 이름 아래 로마를 장악하다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로 향했다. 부관 칼비누스가 이끄는 군단과 병합하여 예전에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고 카이사르와 대치했던 폰투스(흑해 연안의 옛 왕국)의 파르나케스 왕을 습격하여 격멸시켰다.
그는 곧장 배 몇 척을 모아 부하와 함께 이탈리아 반도 남단의 타란토로 가서 말을 타고 로마로 들어갔다. 1년 9개월 만의 귀환이었는데, 그곳에는 카이사르에게 반대하는 로마 전 군단이 집결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 카이사르는 아무런 사전 통고 없이 마르스 광장의 연단에 올라가 사령관 자리에 앉았다. 그 소식을 듣고 몰려온 병사들은 속주 총독에게 어색한 표정으로 경례를 했다. 그러고는 백인대장 몇 명이 앞으로 나와 지금까지의 노고에 대해, 또 적은 보수에 대한 불만과 하루빨리 군역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는 내용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미소를 머금은 채 그 말에 귀 기울이고 있던 카이사르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제군들의 바람이라면 전원 해고하는 수밖에 없군."
그러고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제군들을 제외한 병사들과 함께 개선 행진의 영예를 안았을 때 반드시 그들에게 충분한 보수를 줄 것이다."
모든 병사들은 날벼락을 맞은 듯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이제 군에서 이탈하려던 자들은 오로지 카이사르로부터 노고를 치하받기만을 원할 뿐이었다.
잠시 생각한 후에 카이사르는 말을 이었다.
"시민들이여! 제군들은 상처받고 지쳐 있다. 내가 약속한 보수는 모두 줄 것이다. 나는 위험한 전쟁에서 승리가 코앞에 다가와 있는 지금 배은망덕한 무리로 인해 비난받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리고 연단을 내려왔다.
모든 병사들은 카이사르가 '병사'가 아니라 '시민'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다. 불안에 떨던 그들은 카이사르에게 부르짖으며 매달렸다. 그들은 "진실로 책임을 물어야 할 자만을 처벌하고 그 외에는 모두 용서해 달라"고 애원했다.
카이사르는 멈춰 서서 위엄 있는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누구도 벌하지 않는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다. 잘못을 인정한 자들은 전원 복귀해도 좋다. 그러나 내가 가장 가까이 두고 각별히 총애했는데도 누구보다 선두에 서서 반항한 저들만은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장교들은 낮은 목소리로 서로 의논하고 나서 카이사르에게 진정을 올렸다.
"반란 행위에 대한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허나 그것을 1%의 장교에게만 국한해 주십시오."
꽤 오랜 침묵 끝에 카이사르는 입을 열었다.
"그러면 불복종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겠다. 앞으로 나와 함께 싸우겠다는 그대들 모두의 맹세를 받아들이며 전원을 용서하노라."
마르스 광장에는 엄청난 갈채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병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 포옹하고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울리면서 총독을 찬양했다.
이것은 일찍이 인도 정복을 노린 알렉산드로스가 끝이 보이지 않는 전투에 지친 나머지 동행을 거부했던 전군의 반란을 제압한 이래로 가장 뛰어난 반란 수습 전략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명장은 오로지 혼자 힘으로 전 군단을 다시 한번 수중에 넣었다.
그의 뛰어난 수완으로 인해 원로원이 계획한 반카이사르 공작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카이사르를 실각시키려던 계획이 무산된 것이다.
카이사르는 충성을 맹세한 군단을 이끌고 폼페이우스파 잔당의 토벌에 나섰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폼페이우스가 살해된 후에도 계속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누미디아유바 1세의 지원으로 병력은 6만을 넘었다. 카이사르는 시칠리아 군단의 지지를 얻어 누미디아 왕국의 동쪽 해안 타프수스(지금의 튀니지 해안)를 점거했으며 연이은 전투에서 적병 1만 명을 무찔러 승리했다.
카이사르가 아프리카 속주를 제압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원로원은 서둘러 그를 '대감찰관'으로 임명하고 무제한의 권리의 영전축했을 거행했다. 또 '카이사르 광장'을 조성하고 지구 위에 서 있는 모습의 동상을 만들어 '신에 비견되는 자'라 명명하며 전례 없는 영예를 부여했다.
카이사르는 이 모든 정치적 흥정을 오히려 냉정하게 받아들였으나 개선 행진만은 과거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호화롭게 거행했다. 그것은 그가 반란군을 수습할 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개선 장군 카이사르는 붉은색 옷을 휘감고 백마 여섯 마리가 이끄는 전차에 선 채로 등장해서 관중들의 갈채를 한 몸에 받았다.
물론 전차 경주검투 시합이 개최되었는데 그 모든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 모든 상의 수여식은 모두 '카이사르의 이름' 아래 이루어졌다.

왕이 되고자 했던 독재관

로마 제국 최고의 지위에 오른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로마로 불러들였다. 여왕은 테베레 강을 사이에 두고 카이사르의 아내 칼푸르니아가 살고 있는 집 맞은편에 위치한 아름다운 저택에서 수행원과 함께 살았다. 칼푸르니아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남편의 애인과 첫인사를 건넸는데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너무 높은 것에 대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거의 매일 밤을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지냈다. 그러던 중 다시 전장으로 떠나야 할 상황이 생겼다. 폼페이우스파(폼페이우스의 아들 그나이우스와 섹스투스)가 에스파냐에서 군을 일으킨 것이다.
카이사르는 기병 총감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를 보살피도록 부탁하고 27일간 말을 타고 에스파냐의 코르도바 근처에 도착했다. 적의 포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곳에서 카이사르는 병으로 쓰러졌다. 피로로 인한 쇠약 증세로 며칠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카이사르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전 에스파냐는 물론 로마에까지 전해졌다.
폼페이우스파는 정면 공격을 피하고 수많은 작은 전투를 거듭하면서 소모전을 되풀이하다가 문다 평원에 8만 군을 집결시켜 총공격을 시도했다(기원전 45). 그에 대항한 카이사르 군은 4만 명이었다. 병사들은 강적 앞에서 주춤거리며 좀처럼 전진하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마침내 "나는 이곳에서 멋지게 전사하여 사후에 명예를 남길 것이다. 전투는 이것으로 끝이다"라고 외치면서 적의 전선을 향해 열 발자국 앞까지 돌격해 갔다. 이를 보고 전군이 승리를 확신하며 돌격해 들어가자 거꾸로 적은 우왕좌왕하며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날 해질녘까지 폼페이우스파 군대의 전사자는 3만 3천 명이었다.
도망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에게 항복한 주민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카이사르가 진군했을 때는 광장 한가운데 세워놓은 창끝에 그의 목이 걸려 있었다. 그리하여 카이사르는 에스파냐 속주도 진압했다.
기원전 45년 4월 20일, 수도 창건 기념 축일 전야에 전 로마 시민들은 폼페이우스파의 참패 소식을 알게 되었다. 시민들은 로마 창건 축제에서 카이사르의 이름을 외치며 축하했다.
원로원은 그를 '종신 독재관'으로 선출함과 동시에 전 군단과 전 행정 고관을 지휘하는 '종신 총독'의 직함도 부여했다. 카이사르는 이 모든 직위를 신전 앞에 준비해 놓은 황금 의자(이른바 옥좌)에 앉아 받아들였다.
카이사르는 뛰어난 군인인 동시에 탁월한 문명론자이기도 했다. 역사적인 전투를 치르는 동안 로도스 섬,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등에서 보고 듣고 직접 경험하면서 학습한 최첨단 지식을 로마에도 뿌리내려야 한다고 생각한 카이사르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초빙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가장 먼저 박물관, 도서관 및 대학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그때까지 통용되던 양피지 두루마리가 아닌 파피루스를 하나로 철한 책도 만들게 했다.
또 고정 환율의 금화를 발행하고, 1년을 365일로 나누는 '율리우스력'을 시행하는 등 로마를 명실상부한 '세계의 수도'로 만들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해 나갔다. 또한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쟁을 도모했다.
먼저 트란실바니아(지금의 루마니아 및 헝가리 일부)를 굴복시키고 이어서 발칸(지금의 불가리아), 아나톨리아(지금의 터키 북부), 아르메니아(지금의 터키 동부)를 모두 로마 영내로 흡수하고 페르시아 정복 전쟁을 일으켜 파르티아인(지금의 이란 민족)을 바빌로니아와의 전쟁에 투입하여 카스피해와 옥수스 강에 이르는 영역을 평정하는 장대한 구상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카이사르가 왕권을 손에 넣어야 했다. 페르시아 산악지대의 유목민이 일으킨 기마대였던 파르티아인은 곧바로 위협적인 전투 집단이 되어 이란 평원의 각 지역을 차츰 점거해 나갔다. 그리고 그들의 세력이 어느새 거대해져 그 시점에서 카이사르는 이들을 몰아내야 했다.
이 모든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왕'이 되어야 했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클레오파트라가 집요하게 카이사르를 설득해 온 것이기도 했다. 300년쯤 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쳐부수고 인도의 일부까지 정복했지만 그 위업은 그리스의 신의 혈통이 뒷받침된 '왕'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제국의 재건을 꿈꾸었던 클레오파트라도 결국에는 애인 카이사르에게 그것을 부탁했다. 그녀는 알렉산드리아 네메시스 신전의 무녀가 말한 "파르티아인은 왕에게만 굴복한다"라는 예언을 거듭 얘기하면서 카이사르를 설득했다.
카이사르의 머릿속은 '세계의 수도' 위에 군림하고 '아시아를 석권'한다는 두 개의 대업을 이루는 명목하에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왕권'을 손에 넣고자 하는 집념으로 가득 찼다.
카이사르는 전 로마 영역이 아니라 "동방의 모든 속주에 한해서 나로 하여금 왕으로 칭하도록 하라"라는 말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이 말의 진위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그때까지 공화제를 선호하던 로마 귀족들은 이에 격노했다. 시민들도 "카이사르가 변했다!"라며 그 원인을 클레오파트라에게 돌렸다.
"이집트의 마녀가 그에게 터무니없는 야심을 불어넣었다. 그 여자는 지금 테베레 강 저편의 정원에서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결국 로마의 여왕이 되어 옥좌에 앉아 원로원 의원과 귀족들을 불러들이려 하고 있다. 유서 깊은 로마가 한 여자의 욕망 앞에 굴복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시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소리 높여 비난했다.
카이사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날로 높아져 갔지만 기원전 44년이 되자 누가 기도했는지는 알 수 없는 '왕 카이사르'를 둘러싼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첫 번째 사건은 카이사르의 업적을 기려 로스트라(공공 광장의 연단)에 세워둔 금색 조각상에 어느 날 아침 왕권을 상징하는 흰색 띠를 둘러싼 왕관이 머리에 씌워져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사건은 첫 번째 사건 직후에 일어났다. 1월 26일 카이사르는 알바누스 산 정상에서 페리아이 라티나이 제전을 관람하고 있었다. 그는 예전에 왕의 상징이었던 붉은색 외투에 빨간 반장화 차림을 하고 있었다. 축제가 끝나고 백마에 올라탄 카이사르는 추종자들에게 둘러싸여 호기롭게 로마로 돌아왔다. 그때 많은 구경꾼들 사이로 흩어져 있던 선동자들이 박수를 치며 '왕'에게 행하는 경례를 했다. 그에 대해 군중들이 반감을 가질 조짐을 느낀 카이사르는 체면을 차리며 "나는 왕이라 칭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세 번째 사건은 2월 15일 루페르칼리아 제전에서 일어났다. 카이사르는 페리아이 라티나이 제전과 마찬가지로 왕을 상징하는 복장을 하고 관람석의 황금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정부 고관 전원이 그 주위에 앉았다. 그 앞으로 최고 집정관으로 승진한 안토니우스의 행렬이 지나가기에 앞서 예배를 집도하는 신관단의 행렬이 지나갈 때였다. 신관 중 한 사람이 카이사르의 발 밑에 흰 모직 띠를 둘른 월계수관(왕관)을 놓고 이것을 카이사르의 머리에 씌웠다.
카이사르는 오른손으로 사양하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고관석에 앉은 기마 총감에게 벗기라고 말했지만 왕위를 상징하는 흰색 띠는 잠시 카이사르의 이마에서 펄럭였다. 전 관중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결국 집정관 대리가 카이사르의 머리 위에서 관을 내렸다. 일부 관중들 사이에서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던 중에 안토니우스의 행렬이 등장했다. 그는 카이사르의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왕관을 들어 다시 그의 머리 위에 얹었다. 이번에는 카이사르가 스스로 관을 벗어 관중을 향해 던졌다.
'주권은 민중에게 있다'라는 표시였다. 광장 뒤편의 반왕권파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행동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냈지만 그 앞에 있던 왕권파 무리들은 큰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카이사르여! 귀하께서는 로마 시민들이 보낸 선물을 거절하려 하는가?"
안토니우스는 관을 주워 들고 다시 카이사르의 머리에 얹으며,
"자, 국왕에게 경례를 하자!"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광장의 구석에서부터 끓어오르던 반대파의 목소리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 카이사르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 관을 유피테르(주피터) 신전에 바치겠노라. 내 머리 위보다 신의 머리 위를 장식하는 것이 더 어울릴 테니."
그리고 공문 기록관에게는 "민중은 집정관의 손에서 왕위를 받아들였지만 카이사르는 이를 거절하다"라고 기록하도록 명했다.
이 광경을 목격하거나 전해 들은 카이사르의 반대파 원로원 의원과 귀족들은 이 '종신 독재관'의 야망을 저지할 것을 함께 결의했다.
그러나 어떻게 그를 타도할 것인가. 해결책은 오직 하나. 암살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그가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감행해야 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원로원 의원들은 한 남자를 지목했다. 바로 전 알프스 남부 총독이었고, 현재는 수도 재판관이며 카이사르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3월 18일에 로마를 출발해서 동방정토군의 집결지에 부임하기로 결정하고 3월 15일에 원로원을 소집했다.
음모파의 흑막을 행동에 옮긴 것은 브루투스와 의형제를 맺은 카시우스였다. 그는 카이사르가 원로원에서 자신을 왕으로 추대할 것을 요구하리라고 추측했다. 따라서 회의가 열리기 전에 거사를 끝내야 했다. 카시우스는 동지 60여 명을 모았고 그중 23명이 '행동'을 감행하기로 했다.
14일 밤 카이사르는 친구들과 만찬을 가졌다. 식사를 하면서 그들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카이사르는 '빠르고 격렬한 최후를 맞고 싶다'고 말했다. 그날 밤 아내인 칼푸르니아는 남편의 몸이 피로 물드는 꿈을 꾸고는 다음날 아침에 원로원에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마중 나온 신하의 재촉으로 집을 나섰다.
원로원 앞에서는 점성가 스푸린나가 기다리고 있다가 "3월 15일을 주의하라!"라고 말했다.
"그날이 바로 오늘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직 오늘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카이사르는 일순간 망설이긴 했지만 겁쟁이로 보이고 싶지 않아 단호한 발걸음으로 원로원으로 들어갔다.
의장에 들어서자 전원이 경의를 표하며 기립했다. 소수의 무리들이 카이사르에게 다가왔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죄를 심판받고 있는 동생의 은사를 탄원했다. 이어서 다른 사람들도 탄원을 청하며 카이사르 주변으로 몰려와 그를 둘러쌌다. 그때 등뒤에 있던 카스카가 단도로 카이사르의 등을 찔렀고, 곧이어 정면에 있던 카시우스가 카이사르의 얼굴을 내리쳤다.
연이어 찔러대는 칼을 맨손으로 막던 카이사르는 자신을 암살하는 무리 가운데 서 있는 브루투스를 발견하고 이렇게 소리쳤다.
"브루투스, 너마저!"
카이사르는 이 말을 남기고 결국 폼페이우스 상 발 아래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기원전 44년 3월 18일 로마에서는 전례 없는 엄숙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전 로마 시민이 카이사르의 선정에 경의를 표했다. 카이사르의 시신을 화장하던 장작불 위에 군인들은 무기를, 배우와 검투사들은 의장을 던져 함께 불태우고 전 로마 시민들이 관을 둘러싼 채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안토니우스가 베스타 신전에 맡겨두었던 카이사르의 유서를 가지고 와 모든 고관들 앞에서 큰소리로 읽었다. 거기에는 1억 세스테르티우스의 사재는 시민에게 유증하고 화려한 정원은 나라에 기부한다고 씌어 있었다.
그리고 후계자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를 지명했다. 카이사르는 여동생 율리아의 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를 양자로 들였는데, 이 사람이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대제가 되었다.

등장 객체

이 포인트의 관계망

이 대목에 나온 관계 22건입니다. 점을 끌어 옮기고 휠로 확대할 수 있습니다.관계가 달린 것만 그립니다. 이름만 나온 인물·지명은 아래 목록에 있습니다. 얽힌 갈래가 많은 18개만 그렸고 3개는 아래 목록에만 있습니다.

자주 묻는 것

다른 책입니다. 30포인트 편역본은 한국어 편역이고 원전은 기번의 영문입니다. 섞어 인용하면 사실관계가 어긋납니다. 인물·관계 자료는 편역본 계통에서만 뽑았습니다.
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입니다. 괄호를 내용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포인트 한 장이 약 1만 자, 5천 토큰입니다. 어느 AI 창에도 그냥 들어갑니다. 잘라 붙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있습니다. 포인트 01·02 본문 45건을 사료와 대조해 심각한 오류 6건을 찾았습니다. 전투 승패가 뒤집힌 서술이 두 장에 하나꼴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기준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