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 27

서로 반목하는 두 당의 폭거

로마를 전란으로 몰고 간 녹파와 청파의 싸움
30포인트 편역본
녹파는 아나스타시우스 가계의 지지자였고 청파는 정통 신앙과 유스티니아누스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황제는 5년 이상 청파를 비호했다. 따라서 청파는 궁중이나 원로원, 그리고 여러 도시까지도 제압할 수 있었다. 기번

생명과 재산을 건 전차 경주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국내 예선과 지역 예선에서 우승을 해야 한다. 때로는 본선보다 국내 예선전이 더 치열해서 금메달이 예상되는 유능한 선수가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는 비극이 종종 생기곤 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에서는 원한다면 누구든지 출전할 수 있었다.
당시 올림픽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마차 경기였다. 여러 마리 말들이 끄는 이륜마차 경기로, 영화 <벤허>의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경기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이 마차가 동시에 20대 이상 달릴 수 있는 거대한 경기장이 여러 개 있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이긴 자에게는 월계관이 씌워졌고 그 이름이 가족이나 출신 국의 이름과 함께 칭송되었다. 명예가 영원히 전해지는 서정시에서도 그 영예로움이 칭송되었다고 한다.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도 마차 경기는 인기 종목이었다. 지금도 로마 시내에는 마차 경기가 빈번하게 치러졌던 경기장이 남아 있다. 당시 길이 600미터, 폭 150미터, 트랙 길이가 1500미터인 경기장을 25만 명의 관객이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의 마차 경기에는 큰 차이점이 있었다. 누구라도 참가할 수 있었던 그리스의 마차 경기에 비해 로마의 경우는 참가하기보다는 관람하기 위한 것이었다. 로마의 경우 마부는 말 주인이나 일반 시민이 아니라 이 경기를 전문으로 하는 노예들이었기 때문이다(영화 <벤허>에서처럼 로마 총독의 직속 사령관인 메술라가 경기에 참가하는 일 따위는 생각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마차 두 대가 경기를 펼쳤으며, 마부들은 각각 적색과 백색 유니폼을 입었다. 카이사르가 죽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가 되자 여기에 녹색과 청색, 두 팀이 가세하여 마차 네 대가 한꺼번에 경기를 치렀다.
스타트 라인은 400미터 경주처럼 활 모양의 곡선 지점이었으며 개개의 전차 앞에는 울타리가 놓여 있었다. 경기는 지정된 표식을 한 바퀴 도는 것을 기준으로 코스를 일곱 번 돌아 먼저 들어오는 마차가 승리했다. 그리고 올림픽과는 달리 우승자에게는 거액의 상금이 주어져, 말 주인의 수입을 웃도는 마부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경기는 하루에 25회 열렸고 총 100대나 되는 마차가 연일 대경기장을 장식했다.
참고로 적, 백, 청, 녹 네 가지 색은 계절을 상징하는 것이다. 빨강은 여름의 천랑성(큰개자리의 으뜸가는 별), 흰색은 겨울의 눈, 청색은 가을의 나무 그늘, 녹색은 봄의 전원을 상징했다.
네 가지 색이 상징하는 것이 사계가 아니라 4원소라는 해석도 있다. 빨강은 불, 흰색은 바람, 파랑은 바다, 그리고 녹색은 대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 시민들은 녹색이 이기면 풍요로운 수확을 의미하고 청색이 이기면 해운의 번영을 의미한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어느 주장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농부와 선장의 이러한 대립은 생명과 재산을 당파의 승패에 걸었던 로마 시민들의 맹목적인 열광에 비하면 훨씬 온화한 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기번은 이렇게 의미심장한 말을 하고 있다.

로마 시민을 둘로 나눈 녹파와 청파의 항쟁

축구의 홀리건처럼 때로는 스포츠 응원단이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광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콘스탄티노플에 나타난 청파와 녹파도 이 마차 경기의 열광적인 팬들이 만든 것이었다. 적파와 백파가 언제 어떻게 해서 청파와 녹파로 흡수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칼리굴라 황제 시대에 이미 크게 청파와 녹파로 나뉘어졌던 것 같다.
역대 황제들은 이 민중들의 어리석은 오락경기를 경멸하면서도 묵인했다. 그러나 기번에 따르면 황제 중에는 이 두 당파 간의 경쟁을 능숙하게 이용한 자도 있었다고 한다.
"칼리굴라, 네로, 비텔리우스, 베루스, 콤모두스, 카라칼라, 엘라가발루스 등의 황제는 스스로 녹색이나 청색 중 어느 한쪽 당파에 소속되어 계속 대기실을 드나들며 특별히 선호하는 마부를 격려하는 한편 상대편 마부를 매도하는 등 시민들처럼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즉, 시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그들을 이용했던 것이다. 한편 테오도리쿠스 황제는 지지하는 당은 없었지만 집정관이나 귀족들이 청파 편에 서서 녹파에게 폭행을 가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녹파를 지원했다고도 한다.
마침내 이 두 당의 구분은 지방이나 가정에까지 확산되면서 파벌로 발전했다. 청색과 녹색은 종교적인 대립 이상의 분쟁을 초래했고 가정은 물론 오래된 우정까지도 파괴할 만큼 사람들 의식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되었다. 나아가 이 두 당은 당시 이미 약해져가고 있던 제국의 통치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특정 당을 지지하지 않으면 성직에조차 취임할 수 없는 사태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두 당파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팀이 지면 법률을 무시한 채 거리에서 난동을 부리며 돌아다녔다. 두 파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확산되어 갔으며 대경기장 내의 난동은 늘 피로써 마무리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축제 행사에서 과일 바구니 속에 칼을 숨기고 있던 녹파 당원이 청파 당원 3천 명을 학살하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에 들어서면서 청파가 압도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청파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열성적인 지지자였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황제가 그들을 공식적으로 비호했기 때문이다.
청파의 한 패거리는 이러한 후광을 등에 업고 마치 훈족처럼 긴 머리를 휘날리면서 짧은 소매에 낙낙한 윗도리를 걸치고 괴성을 지르면서 거리의 주민들을 위협했다. 그들은 갖은 난폭한 짓을 일삼으며 돌아다녔다.
그들은 녹파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도 습격해서 금품을 빼앗기도 하고 때로는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피해를 두려워한 시민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야간에 외출을 삼갔다. 그러자 그들은 민가를 습격하고 증거가 남지 않도록 방화까지 저질렀다.

황제를 옹립하려 한 청파와 녹파

이미 시내에는 더 이상 안전한 장소가 없었다. 그들은 교회나 신전까지도 침입하여 살인을 서슴치 않았다.
"나는 허리칼 하나로 상대를 죽일 수 있단 말야." 청파 당원들은 공공장소에서 거리낌 없이 이런 말을 떠벌리고 다녔다. 기번에 따르면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하는 청파 당원들의 소행은 사회 질서 자체를 파괴했다고 한다.
"채권자는 채권의 포기를, 판사는 판결의 철회를, 또 주인은 노예의 해방을, 아버지는 자식들의 난폭한 행위를 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부인은 머슴에게 능욕당했으며 미소년은 유괴당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 앞에서 능욕당했다."
이들의 소행으로 인해 로마는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물론 이를 시정하려고 노력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청파의 경쟁 상대인 녹파는 사직료을 포기했으므로 이길 승산이 없었다. 어떻게든 항쟁하면서 살아남은 녹파 간부들은 자신들이 범하지도 않은 죄목으로 잇달아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청파를 징계하려던 용기 있는 재판관들은 예외 없이 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런 상황에 이르자 청파를 옹호해 온 유스티니아누스도 비로소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는 '당파나 색의 구별 없이 모든 범죄자를 처벌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그러나 청파에게 더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재판이 속출했다. 황제는 이를 시정하려 했지만 사랑하는 아내 테오도라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은 착수할 수 없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테오도라는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모친의 손에 이끌려서 나체 상태로 무대에 오른 일이 있었다. 그때 청파가 동정의 눈길을 보냈던 것을 끝까지 잊지 않고 있었다.
서로 반목하던 두 파가 단 한 번 항쟁을 중단하고 공모하여 폭동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황제가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는데, 이른바 '니카의 반란'이었다.
폭동의 발단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경기장에서 일어난 황제와 시민들과의 언쟁을 전후하여 행해진 7인의 처형이었다. 그들은 청색과 녹색, 두 파의 지지자들로서 소문난 악당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교수형에 처해지려는 순간 갑자기 밧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목숨을 건져 탈출했다. 사람들은 도망치는 두 사람에게 성원을 보냈다.
그들은 수도사의 배로 구조되어 교회로 도망쳤다. 한 사람은 청파였고 또 한 사람은 녹파였다는 점에서 두 파는 이 기이한 인연에 놀랐고 결국 제국의 잔혹한 행위에 분노했다. 이리하여 청파와 녹파는 수인을 해방시키고 복수를 할 때까지 휴전한다는 협정을 체결했다.
그들은 내무장관의 거처로 대거 몰려가 막료와 호위병을 죽이고 감옥을 열어 갇혀 있던 당원들을 탈출시켰다. 장관을 구출하기 위해 군대가 파견되었지만 무장한 수많은 군중의 반격에 부딪혀 콘스탄티노플 시내는 불길에 휩싸였다.
이 두 파는 재무장관과 사법장관의 파면을 요구했다. 그들의 엄청난 파괴력에 두려움을 느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하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두 파의 분노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황제는 복음서를 손에 얹고 귀빈석에 서서 자신의 실정을 인정하고 이번에 두 파가 행한 모든 행위를 인정한다는 굴욕적인 선언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황제의 말을 믿지 않았고 엄청난 야유만 보낼 뿐이었다. 결국 황제는 궁전으로 달아났다.
두 파는 내켜하지 않는 아나스타시우스 황제의 조카 히파티우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에 놀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도망칠 결심을 굳혔다. 테오도라가 의연하게 이를 말린 것에 대해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당원들이 농성하고 있던 경기장에 군대를 투입하여 당원 3만 명을 처형했다. 황제로 추대된 히파티우스도 체포하여 처형시킨 후에 시체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폭동이 진압되고 나서 경기장은 수년간 폐쇄되었지만 마차 경기가 재개되자 두 파의 싸움은 곧바로 재연되었다. 결국 두 파의 난동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황제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즉위하자마자 두 파를 향해 이렇게 말하면서 그들을 엄격하게 다웠다.
"너희 청파들이여,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이제 세상을 떠나고 없다. 너희 녹파들이여, 그는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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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입니다. 괄호를 내용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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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기준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