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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영원의 도시
30포인트 편역본
무능한 황제에게 항거한 고트족
발렌스 황제가 죽은 뒤 동로마의 황제가 된 테오도시우스(379~395 재위)는 유능한 병사였다. 그는 이전에 일어난 고트족의 반란 이후인 382년에 협정을 맺어 고트족이 제국 영내에 정주하는 것을 인정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3년 후인 395년에 로마 군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던 고트족 부대가 다시 반기를 들었다. 황무지를 경작하고 있던 예전의 고트족 병사들도 그 소식을 듣자 호미와 삽 대신 칼과 창을 손에 들었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고트족'이라 칭하는 야만족 군이 나타나서 순식간에 달마티아(구 유고슬라비아 연안)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 아래까지 지배했다.
고트족은 왜 다시 봉기한 것일까. 그때까지 후하게 주어졌던 보조금이 삭감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보조금을 주기로 결정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95년에 타계했다. 그러나 황제가 죽기 이전부터 이미 고트족이 봉기할 조짐을 보였다.
기번은 다음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한 가지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뒤를 이은 무능한 두 아들에 대한 모욕이었으며 또 한 가지는 알라리크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두 아들은 황제로서 합당한 인물이 아니었다. 형 아르카디우스(동로마 황제)는 황제가 된 후에도 거의 실권을 갖지 못했고, 13년의 통치 기간 동안 동로마는 친위대장 루피누스, 환관 에우트로피우스, 황비 에우독시아, 그리고 친위대장 안테미우스, 이 네 사람에 의해 조종되고 있었다.
또한 동생 호노리우스(서로마 황제)는 로마 제국사상 보기 드문 무능력자였다. 그는 고트족이 로마 시를 정복했다는 소식을 라벤나(베네치아의 남쪽, 아드리아해에 면한 거리)에서 들었다. 부하가 "로마를 잃었습니다!"라고 외치는 순간 황제는 자신이 아끼는, '로마'라는 이름을 가진 병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고는 대소동을 피웠다. 그것이 '로마 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뭐야. 바로 그 로마 말인가?"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자존심이 강한 고트족 병사가 이렇게 무능한 두 사람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하나의 이유로 등장하는 알라리크는 고트족에서 제일가는 훌륭한 가문 출신으로 전투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 여러 번에 걸쳐 로마 군을 지휘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로마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로마는 그후에 전장에서 알라리크의 재능을 실컷 맛보게 되었다.
"고트족이 각 지역을 제압하고 콘스탄티노플의 성벽 밑에 집결해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다행히도 수도는 견고한 성벽에 의해 보호되어 있었다. 알라리크가 지휘한다고 해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기는 어려웠다. 당시 다른 야만족이라면 자신들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해도 물러서지 않고 계속 공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냉철한 두뇌의 소유자였던 알라리크는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지 않고 칼날을 그리스로 돌렸다. 그리스의 모든 지역이 그들의 손에 함락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적을 총사령관에 임명한 아르카디우스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보좌관이기도 했던 스틸리코 장군은 서로마가 보유하고 있던 마지막 비장의 카드였다. 결국 서로마를 공격하는 자도 수비하는 자도 게르만인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는 장군이나 대신들 대부분이 게르만인이었으며 이미 로마 제국은 게르만인 없이는 성립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사실은 후에 스틸리코 장군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까지 막다른 곳으로 몰아붕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전국 각지로부터 배를 모아 병사를 싣고 그리스로 건너갔다. 돌연 나타난 로마 군의 대무리를 보자 용감한 알라리크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오랜 전투 끝에 고트족은 많은 병사를 잃고 어쩔 수 없이 산악 지대로 퇴각하고 있었다. 로마 군은 그들을 추격하여 산악지대를 포위하고 하천을 막았다. 병량터 공격 작전이었다.
승리를 확신한 스틸리코 장군은 오랜 전투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에게 달콤한 휴식 시간을 허락했다. 고트족에 대한 감시는 당연히 허술해졌다. 알라리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군은 위험한 산길을 앞질러 가서 로마 군의 포위망을 돌파했다. 게다가 그들은 스틸리코 장군에게 들키기 전에 중요한 거점인 에피루스(에페이로스) 속주를 완전히 점령했다.
재빠르고 능숙한 알라리크의 솜씨에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곤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대로 간다면 로마 제국 전체를 점령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는 알라리크를 동 일리리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강적이 갑자기 황제의 동맹자가 되자 스틸리코 장군은 몹시 놀랐다. 그는 상부의 강압적인 명령에 의해 철수해야만 했다. 이 조치는 결과적으로 적과 아군 양쪽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리스를 파괴한 장본인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지금까지 로마와의 조약을 준수하고 있던 주변의 야만족과 동맹국들은 분개했고 그들에게 자식의 생명을 빼앗기고 아내를 겁탈당한 남자들은 굴욕감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후 족장회의에서 정식으로 서고트족의 왕이 된 알라리크는 정치가로서의 재능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동서 로마의 두 황제와 번갈아가며 거짓 약속을 하면서 고트족과 자신의 지위를 착실히 구축해 나갔다.
민중의 오판으로 살해된 스틸리코
다 잡은 알라리크를 놓친 스틸리코 장군은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는 게르만 출신이면서도 선제 테오도시우스의 이념을 이어받아 야만족과의 융합과 대로마 제국의 재건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우수하고 젊은 병사가 필요했다.
그는 징집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의 로마인은 야만족 출신의 병사들에게 보호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또 야만족들에게 사방팔방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계속해서 밀 배급을 받는 등의 경제적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평화와 식량이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런 나날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신이 엄한 징계를 내릴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징집령은 바로 그에 대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오랜 평화로 인해 안락한 생활에 젖어 있는 로마인들이 징집 명령을 수용할 리 없었다. 그는 시민들의 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게다가 그가 야만족과 결탁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아 결국 고발되기에 이르렀다.
==그가 없었다면 로마는 좀더 빨리 멸망했을 것이다. 그가 마음만 있었다면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로마 제국을 사랑했고, 로마인들은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최후의 순간을 각오한 스틸리코 정군은 광분에 떨고 있는 부하를 위엄 있는 태도로 제압하고 스스로 처형의 길을 선택했다. 408년, 스틸리코 장군은 서로마 제국의 수도 라벤나의 교회에서 처형되었다.
사실 알라리크는 그가 처형되기 전에 하나의 계약을 체결했다. 그것은 로마가 배상금으로 황금 1800킬로그램을 지불한다는 내용이었다. 스틸리코는 스스로 처형됨으로써 그 약속을 무효화하려 했다.
알라리크는 황제에게 약속한 황금 1800킬로그램을 지불하면 즉시 철수하겠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미 스틸리코 장군이라는 유능한 부하를 잃은 황제는 판단력을 잃고 있었다. 알라리크의 온건한 태도를 나약함의 표출로 받아들인 황제는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알라리크가 제 발로 로마를 떠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알라리크는 황제의 예측과는 달리 즉시 진군을 개시했다. 알프스를 넘어 제국의 각 도시를 차례로 약탈해 나갔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군대는 3만 명이 추가되었으며 도중에 로마 군의 반격은 한 차례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난공불락의 라벤나를 직접 공격하는 대신 아드리아해 연안을 피폐화시키면서 로마까지 진격해 왔다.
이때 로마 시민들이 보인 반응은 기묘했다. 그들은 야만족들처럼 대로마 제국의 수도를 포위당한 것에 대한 분노를 적을 향해 표출한 것이 아니라 황제의 양모인 세레나 비에게 드러냈다.
그녀는 처형된 스틸리코 장군의 아내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가 죽기 전 게르만 출신인 그가 야만족과 결탁하려 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로마 시민들은 그의 미망인인 세레나 비가 적과 은밀히 내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민들의 분노를 진정시킬 방법을 찾지 못한 원로원은 반론을 제기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세레나 비는 곧바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시민들은 이제 고트족이 철수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예측이 빗나가자 민중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야만족의 발 아래 사라진 신의 도시
전술한 바와 같이 호노리우스 황제는 이러한 사태에 완전히 무관심했고 로마 시민은 황제가 로마를 구원하리라는 기대 따위도 하지 않은 채 포위 상태는 지속되었다. 결국 로마 시에는 식량 보급이 끊어졌고 고트족이 아니라 기아가 사람들을 덮쳤다. 배급이 사라지고 음식 가격이 급등하여 가난한 사람들은 주식조차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민중들은 구토가 날 정도의 비위생적인 식품이나 보기에도 유해한 음식을 서로 빼앗아 먹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동료나 이웃을 몰래 살해해서 그 시신을 먹는 자들이 속출했고 심지어 자기 자식을 죽여서 먹는 어머니까지 있었다고 한다.
몇 천 명의 시민들이 기아로 죽어갔고, 더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로마의 공동묘지는 성벽 밖에 위치해 있어서 시체를 매장할 수도 없었다. 거리 곳곳에는 시체가 방치된 채로 나뒹굴고 있었으며 참기 힘든 악취가 온 시가지를 뒤덮으면서 전염병의 위험에 직면했다.
배불리 먹으며 평화로운 생활에 푹 빠진 나머지 현실 감각이 둔해진 로마인들에게 엄벌을 내린 것은 신이 아니라 고트족이었다. 로마 시민의 운명은 그들이 오랜 세월 동안 업신여겨온 고트족의 손에 놓여 있었다. 로마는 이제 함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드디어 알라리크로부터 철수 조건이 전달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놀라운 것이었다. "로마 시 내에 있는 모든 금은과 값진 재산을 비롯하여 모든 야만족 출신의 노예를 내놓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내용을 전해 들은 로마의 사절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국왕 폐하의 소망이 그러하시다면 저희에게 남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대해 알라리크는 이렇게 말했다.
"목숨이다."
그러나 결국 알라리크는 이성을 되찾고는 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완화해서 조정했다. 최종적으로 그가 요구한 것은 황금 2270킬로그램, 은 1360킬로그램, 비단 장의 4천 벌, 양질의 옷 3천 장 등이었다.
교회를 포함하여 시내 각처에서 모아들인 금은보화가 알라리크에게 전달되자 그는 약속대로 병사들을 철수시켰다. 그리하여 곧바로 성문이 열리고 다시 테베레 강과 주변 지역으로부터 로마 시로 물자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성밖에는 고트족의 방해 없이 사흘간에 걸쳐서 자유시장이 섰고, 그곳은 굶주린 시민들로 넘쳐났다.
로마는 또다시 평온을 되찾았지만 건국 이래 난공불락이었던 로마가 야만족에게 유린되었던 사실은 제국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함락을 지켜보고 나서 집필한 『신의 나라』에서 "로마 시도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지상에 세워진 '신의 나라'의 발전이며 다시 밀해 인류의 영적 진화이다"라고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로마는 '영원의 도시'로 불려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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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입니다. 30포인트 편역본은 한국어 편역이고 원전은 기번의 영문입니다. 섞어 인용하면 사실관계가 어긋납니다. 인물·관계 자료는 편역본 계통에서만 뽑았습니다.
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입니다. 괄호를 내용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포인트 한 장이 약 1만 자, 5천 토큰입니다. 어느 AI 창에도 그냥 들어갑니다. 잘라 붙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있습니다. 포인트 01·02 본문 45건을 사료와 대조해 심각한 오류 6건을 찾았습니다. 전투 승패가 뒤집힌 서술이 두 장에 하나꼴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기준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