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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분할 통치의 음양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왜 제국을 4분할했는가
30포인트 편역본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치세는 역대 그 어떤 황제보다 훌륭했다. 정의와 국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감정은 물론 자신의 감정조차 멋지게 억제하고 은혜를 줄 수 있는 지혜로운 인격의 소유자였다. — 기번

해방 노예 출신의 디오클레티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 재위)는 과거 50년 동안 로마 제국을 지탱해 오는 과정에서 찾아온 위기를 종식시키고 로마를 전제군주 시대로 이끈 인물이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인물의 출신 배경에 대해서는 양친이 해방노예로 서기관을 지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로마의 노예제도는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오리엔트 제국이나 그리스의 노예는 평생을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로마는 달랐다. 노예는 주인의 온정이나 스스로의 역량(검투사나 배우 등)으로 해방노예라는 자유로운 신분을 획득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전과가 없는 등 일정한 조건을 갖춘 해방노예에게는 시민권이 주어졌다.
해방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인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탁월한 재능과 여러 가지 행운에 힘입어 군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하여 모이시아 속주의 총독, 집정관, 근위대장 등의 요직을 역임했고 특히 페르시아 전역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따라서 전 황제 누메리아누스(283~284 재위)가 죽자 자연스레 동료들로부터 제위에 가장 적합한 인물로 천거되었던 것이다.
후에 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행한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를 두고 다음과 같이 황제로서의 자질에 의문을 제기한 역사가도 있었다. "그에게는 용기가 부족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즉, 기독교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박해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전 로마 군의 존경을 받았던 영웅에게 용기가 부족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 기번은 독특한 견해를 갖고 있다.
"분명 전장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용기가 부족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명성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경쟁자들에게 과감히 도전하는, 이른바 영웅 특유의 호방함은 부족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경험이 풍부했고 오래 참고 견디는 견인불발의 정신, 실무 능력, 근면, 온건, 엄격, 게다가 사고의 유연성 등 뛰어난 재능을 두루 겸비하고 있었다.
그는 카이사르 사후에 공화제를 개혁하여 초대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같이 새로운 제국의 창건자라 할 만큼 눈부신 치적을 남겼다. 더구나 그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처럼 불필요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그것을 이루어냈다.

정적을 포용한 정치적 수완

기번이 말하듯이 그에게는 호방함이 부족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로마사에서 호방함만을 가지고 황제 자리에 올라 통치에 실패한 자가 얼마나 많은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군인 출신이면서도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다. 그것은 그의 결점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이었다.
그는 자신과 격돌한 카루스(282~283 재위) 황제의 오른팔이었던 아리스토불루스를 측근으로 영입했고 숙적이었던 사람들의 생명이나 재산뿐만 아니라 지위까지도 존중해 주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표명한 온정 조치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분명 정적이었던 카루스 황제와 카리누스(283~285 재위) 황제는 사람의 재능을 알아보는 데 뛰어난 안목을 지니고 있었으며 정치, 경제, 그리고 군사의 요직에 유능한 사람들을 배속시켰다. 정적의 후원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뛰어난 사람들을 추방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커다란 손실이며 그와 동시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자신의 자리도 위태롭게 하는 일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정적의 신하를 요직에 등용하는 황제의 인사 정책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당시에는 황제가 범죄자에게 실로 하찮은 온정이라도 베풀라치면 시민들은 감격한 나머지 칭송을 퍼부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이러한 조치는 민중들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았다. 게다가 그들을 회유함으로써 50년간 끊이지 않았던 내분을 종식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황제는 민중들의 칭찬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마르쿠스안토니누스 두 황제의 인도주의를 배우고 실천하겠노라고 공언했고 그대로 처신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안토니누스 황제처럼 제일 먼저 공동 통치자를 내세웠다. 그러나 공동 통치자를 내세운 이유는 안토니누스 황제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안토니누스 황제는 자신의 아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들에게 황제의 용포인 자의를 물려주었다. 게다가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전 로마 시민의 행복을 희생하게 되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달랐다. 그는 로마 제국의 동서 양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유능한 부하이면서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인물을 공동 통치자로 선정했다.
공동 통치자, 즉 요제가 된 막시미아누스(285~305 재위)는 농부 출신의 군인이었다. 따라서 그는 글을 읽지 못했고 요제가 된 후에도 천박한 언동과 풍모로 주변의 빈축을 사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충실하게 국무에 임했다.

로마 제국을 원활하게 움직인 4중주

나름대로 유능한 요제를 얻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였지만 비대해진 로마 제국을 통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국은 사방으로부터 야만족의 침공을 받게 될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고 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대와 황제의 원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황제의 권능을 더욱 분할하여 유능한 두 장군 갈레리우스(305~311 재위)와 콘스탄티우스 1세를 부제로 임명했다.
갈레리우스는 소 막시미아누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는 막시미아누스와 같은 지방, 같은 농부 출신의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도덕적인 면이나 능력 면에서 막시미아누스보다 더 뛰어났다.
다른 세 요제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신분 출신이었던 콘스탄티우스 1세는 성격이 매우 온화했으며 자상한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일찍이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두고 '자의가 어울리는 인물'로 평가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정치 수완은 탁월했다. 그것은 부제들과 정치적인 결속을 강화시킨 방법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는 부제 두 사람을 지명하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갈레리우스를,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콘스탄티우스 1세를 양자로 삼고 나아가 아내와 이혼하게 하여 자신의 딸과 결혼시켰다.
이리하여 콘스탄티우스 1세에게는 갈리아, 에스파냐, 브리타니아의 방위를 맡기고 갈레리우스 황제에게는 일리리쿰의 모든 속주의 방위를 맡겼다. 또 막시미아누스 황제는 이탈리아아프리카를, 그리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자신은 트라키아, 이집트, 그리고 풍요로운 아시아의 모든 속주를 통치하기로 했다. 네 황제가 연대해서 광활한 로마 제국을 유지하고 야만족의 침공을 받았을 때는 서로 지원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이리하여 유명한 '제국의 4분할 통치'가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이것이 어디까지나 분할 통치였지 분열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합중국 제도를 취한 것이다.
나아가 그는 소규모의 속주를 12관구로 정리하고 행정 처리 능력을 향상하도록 도모했다. 그리고 속주의 총독과 관구 대리인은 군사적 권한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군대는 전혀 다른 계통의 지휘 아래 두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속주가 야만족의 침공 등으로 위기에 빠졌을 때 신속하게 군대를 파견할 수 있었고, 속주의 반란이나 폭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행정 개혁은 대체로 호의적으로 수용되었지만 이탈리아의 주민들만은 불만을 나타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면세 대상이었던 그들도 다른 여러 속주들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내야 했기 때문이다. 영원의 도시라 불리는 로마조차도 더 이상 우대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에 거처를 마련하지 않은 것은 물론 재위 기간 중에 로마를 방문한 것은 불과 한 번뿐이었다. 로마를 대신하여 새로운 정치 중심으로 부각된 곳은 서부에서는 밀라노토리노, 동부에서는 테살로니카니코메디아(지금의 터키 이즈미트)였다.
두 부제는 두 정제에게 최고 권위자로서의 경의를 표했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 대해서는 젊은 세 요제 모두 공동의 은인으로서 충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서는 권력을 둘러싼 질시나 의심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시대에는 매우 드문 일로서 음악에 비유한다면 리더의 탁월한 리드로 절묘한 화음을 내는 사중주와 같다.
이 4분할 통치로 인해 페르시아와 갈리아 방면은 안정되었고 로마 제국은 과거의 위엄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 훌륭한 사중주도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아무리 대단한 카리스마를 지녔다 해도 1천 킬로미터나 되는 광대한 국경을 오랜 기간 동안 평화롭게 보존하기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제국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야만족들은 로마의 주둔 부대가 경계를 늦춘 틈을 타서 종종 공격을 시도해 왔다.
다행스럽게도 갈레리우스 황제는 단 한 번도 야만족이 로마 제국의 영내를 침범하도록 허용한 적이 없었다. 한편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갈리아의 침공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들을 격퇴하긴 했지만 랑그르(프랑스 동부)에서 행해진 전투는 얼음 위를 걷는 듯한 접전이었다.
그 상황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콘스탄티우스 1세가 얼마 안 되는 호위대만을 이끌고 평원을 통과하던 중 갑자기 나타난 적의 대군에게 포위되었다. 부제는 부상을 당했지만 랑그르까지는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야만족이 대거 몰려오는 것을 보고 당황한 시민들은 그만 성벽 문을 닫고 말았다. 부제는 그물에 담긴 채 성벽으로 끌려 올라가는 굴욕적인 경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직후에 부제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사방에서 달려온 로마 군이 저녁 노을이 질 무렵까지 야만족 6천 명을 격퇴했다."
4분할 통치와 동시에 행해진 군의 새로운 지휘 체계가 콘스탄티우스 1세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두 정제가 퇴위하고 세대가 바뀌자 네 명의 정부제의 존재가 거꾸로 권력 항쟁을 낳게 되었고 제국 내부는 또다시 불안정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무리 훌륭한 조직도 운용하는 사람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좋지 않은 면이 더 크게 부각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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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입니다. 괄호를 내용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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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포인트 01·02 본문 45건을 사료와 대조해 심각한 오류 6건을 찾았습니다. 전투 승패가 뒤집힌 서술이 두 장에 하나꼴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기준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