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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자초한 제국의 쇠망
로마 제국에는 왜 30명이나 되는 참주가 출현했는가30포인트 편역본
아버지를 버린 갈리에누스
260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 군에게 체포되자 그때까지 제국 서부의 통치를 담당하고 있던 아들 갈리에누스가 단독 황제(260~268)가 되었다. 그는 자의를 걸치고 로마 시민들 앞에 나타나 자신이 유일한 황제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사실 이러쿵저러쿵 잔소리가 많았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그에게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따라서 갈리에누스는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기는커녕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그는 빼앗긴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거병하지도 않았으므로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옥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측근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셨다. 나는 그 분이 훌륭한 군인답게 행동한 것에 만족한다."
갈리에누스 황제는 박학다식하고 시를 즐겨 썼으며 연설에도 뛰어났다. 그러나 황제로서 자격을 갖추지는 못했다. 그는 간단한 문제조차 결단을 내리지 못할 정도로 우유부단했을뿐더러 로마 군이 패배했다는 통고를 받고서도 어울리지 않는 미소만 띠고 있을 뿐이었다. 또 야만족의 침공으로 속주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무능하고 잔혹한 황제
국가의 위기, 아버지에게 갚아야 할 은혜, 그리고 민중의 고통조차 외면한 인물이 황제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 제국 도처에서 반란의 횃불이 피어오른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제위를 노리는 자가 나타났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모시던 사람들이었다.
참주란 무력으로 황위를 찬탈하여 황제의 칭호를 사칭하는 자를 말한다. 참주를 노린 자의 동기나 행동을 살펴보면 그들 대부분이 단순히 야심 때문이 아니라 갈리에누스 황제에 대한 혐오감이나 공포심으로 인해 행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갈리에누스 황제는 무능할 뿐만 아니라 잔혹한 데다 의심이 많았다. 따라서 황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늘 자신이 언젠가는 황제에 의해 살해될 것이라는 공포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에 로마 제국에 서른 명이나 되는 참주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기번은 이 30이라는 숫자가 미심쩍다고 말하고 있다.
"30이라는 숫자는 나중에 '로마 황제사'를 저술한 역사가들이 옛날 아테네 시에 나타났던 악명 높은 '30인의 참주'를 본따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로마에 등장한 참주의 수는 그들 가족들을 다 포함하지 않는 한 도저히 서른 명이 될 수가 없다. 기번은 이 시대에 황제를 사칭한 사람은 열아홉 명이었다고 한다.
이 열아홉 명을 살펴보면, 동부의 속주에서 다섯 명, 갈리아를 포함한 서쪽 속주에서 열네 명이 나타났다. 이들 중에 평화롭게 생애를 마친 사람이나 천수를 누린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피로써 황제 자리에 오른 사람은 역시 부하의 음모나 모반으로, 혹은 내전의 혈투 속에서 죽어갔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과 더불어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군대나 속주 내에서 인정받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원로원이나 로마 제국의 법률에 의해 공인된 것은 아니었다. 갈리에누스 황제는 분명 영예로운 인물은 아니었지만 로마 제국 시민의 지지를 받은 것은 사실이며 원로원이 정식으로 인정한 황제였다.
그 외에 '제국의 왕'으로 불린 사람은 단 한 사람 오다이나투스밖에 없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그는 페르시아 군을 물리친 로마의 은인이었다. 원로원은 이 용감한 시리아인에게 정제의 칭호를 수여했다. 이에 반대하는 로마 시민은 단 한 사람도 없었고 냉혹한 갈리에누스 황제조차 그의 무훈을 순순히 인정했다. 또한 그가 죽은 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존경했고, 광활한 그의 영지를 환수하지 않고 미망인 제노비아에게 양도했다.
제노비아는 클레오파트라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난 미인으로 칭송받고 있었다. 후에 어린 아들을 옹립하여 팔미라의 여왕이 된 그녀는 7만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 이집트로 원정을 갔으며 로마 제국의 영토를 침략하기도 했다. 팔미라 군은 파죽지세로 영토를 확장하고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하여 대팔미라 제국을 구축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아우렐리아누스(270~275 재위) 황제는 팔미라 대토벌 군을 출전시켜 단숨에 그들을 섬멸했다. 그리고 제노비아를 로마로 데려와서 개선식이 치러지는 날까지 식사, 미용, 건강 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미모가 손상되지 않게 했다. 개선식을 치르며 여기저기 끌려 다니던 그녀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동한 시민들은 황제에게 그녀의 사면을 요구했다. 그녀는 패군의 우두머리였는데도 무죄를 언도받고는 로마 교외에서 우아한 삶을 살다 세상을 떠났다.
로마 제국 내부의 적
유혈 참사를 거쳐 황제를 사칭했고 역시 처참한 전쟁을 치른 후에 실각된 참주들 가운데는 덕망 높은 인물들이 몇 명 있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황제의 자질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중 투구와 갑옷을 만드는 일개 대장장이였던 마리우스는 괴력과 배짱을 무기 삼아 군대를 이끈 이색적인 인물이었다. 소박함과 포용력으로 병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는 하나 대장장이 일과 싸움밖에 몰랐던 그에게 로마 제국을 통치할 만한 능력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역사적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난세에 출세하는 지름길은 무훈을 세우는 것이었다. 황제를 사칭한 자들은 거의 대부분 군인이었다. 원로원 의원이었던 자는 테트리쿠스 한 명뿐이었으며 귀족 출신은 피소 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칼푸르니우스 피소에 대해 짚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로마의 명문가인 칼푸르니우스 가문 출신 중에는 제국의 여러 요직을 지낸 인물들이 많았다. 또 피소 자신도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 사실은 그를 죽인 황제 자신이 "적이지만 피소의 고결함은 칭찬할 만하다"라고 하며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죽자 원로원이 그의 위업을 기리는 기념품을 보낼 것을 갈리에누스 황제에게 진언했다고 한다. 갈리에누스 황제는 그가 비록 반역자였지만 그것을 기꺼이 허락했다.
오다이나투스나 피소에 대한 처우는 예외 중에서도 예외였다. 참주들에게는 무시무시한 벌이 기다리고 있었고, 참주를 추대한 군대나 속주 시민들에게도 엄벌이 내려졌다. 일리리쿰에서 황제를 사칭했던 인게누스가 진압된 직후에 갈리에누스 황제가 한 고관에게 건넨 칙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무기를 손에 든 자 모두를 학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정도라면 전장에서도 늘 있는 일이다. 노약자를 불문하고 남자는 모두 근절시켜라. 다만 아이들과 노인을 처형할 시에는 짐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는 수단을 강구하도록 하라.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적자이며 많은 군주의 아버지이자 형인 짐을 비방한 자나 적의를 가진 자에게는 모두 죽음으로 보복하라. 특히 인게누스와 같은 자가 황제로 추대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갈기갈기 찢어서 잘게 다져라! 짐의 분노를 그대에게 전하고자 직접 이 칙서를 쓰노라."
로마 제국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야만족에게 행해져야 할 무력과 지혜가 이처럼 제국 내부에서 헛되이 낭비된 것은 로마의 국력 저하에 박차를 가하는 일이었다. 그 근원은 뭐니 뭐니 해도 갈리에누스 황제의 부덕에 기인한다. 황제 스스로가 로마 제국을 쇠망의 길로 이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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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입니다. 괄호를 내용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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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포인트 01·02 본문 45건을 사료와 대조해 심각한 오류 6건을 찾았습니다. 전투 승패가 뒤집힌 서술이 두 장에 하나꼴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기준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