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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포에니 전쟁

지중해의 패자 카르타고와 로마 제국의 대격돌
30포인트 편역본
로마의 해군은 국가 전체로 보면 터무니없이 작은 규모였지만 효율적인 통치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 정도 규모로도 충분했다. 원래 로마인의 야심은 육상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최초의 본격적인 해군

지중해의 해상권은 시칠리아 섬에서 동쪽으로는 그리스가 장악하고 있었고, 코르시카 섬, 사르데냐 섬에서 서쪽으로 갈리아 연안(지금의 남프랑스), 이베리아 반도, 북아프리카 연안에 이르기까지 모두 카르타고가 지배하고 있었다. 또한 경계에 해당하는 시칠리아 섬의 동쪽 연안은 그리스가, 서쪽 연안은 카르타고가 식민시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식민시인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에는 오래전부터 카르타고에 대항하기 위해 이탈리아 반도에서 집결된 용병 부대가 있었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국경 변경 조약에 따라 군단이 해산되었지만 용병들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마메르티니'라 불리는 용병대를 만들어 같은 그리스계의 메시나를 공격하여 약탈하고 그곳을 지배했다. 그후 20년간에 걸쳐 그들은 메시나 해협을 건너 이탈리아 남부 마을들을 습격해 왔는데 그때 시라쿠사의 왕 히에론은 이 게릴라 병단을 토벌하기 위해 메시나를 포위했다.
위기에 빠진 마메르티니 용병대는 카르타고에 원조를 요청했다. 그런데 원군으로 온 카르타고가 오히려 본거지를 점령했다. 원군이 적군으로 돌변했다고 생각한 마메르티니 용병대는 이번에는 로마에게 해방을 요구했다.
로마에게 시칠리아는 끊임없는 욕망의 대상인 황금 도시였기 때문에 이 제안은 실로 달콤한 유혹이었다. 게다가 로마의 원로원은 카르타고와의 대립에 커다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문제의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왕정 시대부터 내려온 백인대회의였다. 상공업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백인대회의는 초애국주의자 집단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마메르티니 용병대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던 중 기원전 264년 봄에 호민관이었던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소함대가 메시나 해협을 건너 마메르티니 용병대와 함께 메시나를 급습했다. 이 전투에서 카르타고의 대장 한노를 포로로 잡아들여 '노예로 갤리선을 저을 것인지 아니면 전군을 철수시킬 것인지' 양자택일을 하도록 강요했다. 이것이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시작이었다.
이때 한노는 철수를 표명했다. 그러나 카르타고 정부는 한노의 굴욕적인 결정에 격노하여 그를 책형에 처하고 동명이인인 또 다른 한노를 대장으로 내세워 역습을 가했다. 이 한노는 시칠리아 섬에 상륙하여 먼저 그리스와 동맹을 맺고 시라쿠사의 왕 히에론과 함께 로마 군과 격전을 벌였다.
로마의 클라우디우스는 서둘러 2만 명의 본대를 상륙시켜 시라쿠사 군을 공격했지만 참패하고 말았다. 로마 군은 히에론과 교섭하여 부전동맹을 맺고 아그리젠토 시를 포위하여 7개월 후에는 카르타고 주둔군을 격파했다. 이에 대해 카르타고는 하밀카르 바르카스(한니발의 아버지)가 이끄는 해군을 투입하여 해상으로부터 로마의 보급기지를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로 '제해권의 중요성'을 깨달은 로마는 수개월에 걸친 준비 끝에 최초의 본격적인 해군을 창설했다. 그들은 그리스와 카르타고가 자랑하는, 스피드를 중시한 가늘고 긴 5단층 갤리선과는 달리 둔중한 형태의 함선을 만들었다. 날카로운 쇠갈고리와 긴 도개교를 돛대 위에 단 그 함선은 '까마귀' 전함이라 불렸다.
적과 아군의 함대가 서로 격돌하면 까마귀 부리 모양의 쇠갈고리가 적의 함대 안으로 철퍼덕 떨어지도록 고안된 배였다. 로마 병사들은 7미터 길이의 도개교를 건너 적의 함대로 쳐들어가서 제압하는 것이다. 이른바 육상에서 성을 공격할 때와 똑같은 방식을 해상전에 응용할 수 있는 전함 120척을 만들었다.
전함 130척을 이끌고 온 카르타고의 하밀카르 군대는 속력이 느리고 급조된 듯한 로마의 함대를 얕보고 공격을 시도했지만 '까마귀' 전함의 위력으로 인해 함대를 40척 이상 잃고 패주했다. 지중해에서 불패지를 자랑하던 카르타고 본국은 로마 군의 위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세등등해진 로마 군은 함선 330척, 병력 15만을 추가하여 새로운 함대를 편성했다. 하밀카르가 이끄는 거의 같은 숫자의 카르타고 해군과 시칠리아 섬 서단의 마르살라 만에서 격돌하여 이긴 로마 군은 그 여세를 몰아 북아프리카의 본 곶에서 상륙을 감행하여 카르타고 시로 접근했다.
놀란 카르타고는 강화를 요청했지만 로마의 지휘관 레굴루스가 이를 일축했기 때문에 카르타고 시민은 결사 항전을 결의하고 엄격한 단련 교육으로 유명한 스파르타 출신의 그리스인 크산티포스에게 전군의 지휘를 맡겼다. 크산티포스는 취약한 육군을 재건하기 위해 기병대와 코끼리 부대를 이용한 새로운 전술을 고안했다.

로마의 영역을 확대시킨 전쟁

기원전 255년 카르타고 시 남쪽에서 결전을 벌이다 본 곶까지 추격당한 로마 군은 결국 패하고 말았다. 살아남은 것은 불과 2천 명이었고 레굴루스도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그후 몇 년간은 카르타고의 우세가 지속되었지만 카르타고의 새 사령관인 하스드루발 장군이 시칠리아 섬의 팔레르모를 탈환하려다 병사 2만 명을 잃고 대패하여 상황은 다시 역전되었다.
화의를 시도하기로 한 카르타고는 포로인 레굴루스를 동행시켜 로마에 강화 사절을 파견하여 평화 협정을 맺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로마로 돌아간 이 집정관이 원로원에게 전쟁 속행을 역설하는 바람에 교섭은 결렬되었다. 다시 카르타고로 되돌아온 레굴루스는 고문 끝에 살해당했다.
전투는 속개되었고, 이때 카르타고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사람이 하밀카르 바르카스, 즉 한니발의 아버지였다. 카르타고 군이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했을 당시 병력과 국고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던 로마 원로원은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이 자비를 모아 군함 2백 척을 건조하여 4백 척의 카르타고 해군에게 도전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카르타고 군선 120척을 격퇴한 로마 군이었다.
이리하여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241년까지 이어진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섬을 포기하고 배상금 2200탈렌트를 10년간에 걸쳐 지불한다는 조건으로 막을 내렸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전조는 카르타고의 내란으로 시작되었다. 반란군이 시가지를 포위하여 하밀카르 장군이 이를 섬멸하는 데 무려 3년이 걸렸다.
그 틈을 타 로마 군은 사르데냐 섬을 점거했다. 물론 카르타고는 항의를 했지만 로마는 오히려 선전 포고를 했다. 이때 카르타고는 내분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르데냐 섬을 포기하는 것은 물론 코르시카 섬까지 헌상하고 나아가 1200탈렌트를 추가로 배상하는 데 합의했다.
로마는 카르타고로부터 얻은 시칠리아를 최초의 속주로 만들고 이어서 사르데냐 섬과 코르시카 섬을 합병하여 제2의 속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갈리아인과 영토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난폭한 갈리아인은 보병 5만, 기병 2만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 간담이 서늘해진 원로원은 갈리아인이 믿는 광폭한 신들을 굴복시키기 위해 로마 신들의 힘을 빌린다는 명목 아래 인신공양이라는 구습을 부활시켜 갈리아 병사 두 명을 생매장했다.
이 의식으로 신들이 만족했는지 탈라모네에서 적을 포위한 로마 군은 일거에 승리를 거두었다. 갈리아 병사들은 4만 명이나 사망했고 로마 군은 포로 1만 명을 얻음으로써 완승을 거두었다.
이 새로운 영토는 '갈리아키살피나(알프스 남쪽의 갈리아)'라는 제3의 속주가 되어 밀라노를 수도로 둔 식민시 두 개가 건설되었다.
로마의 영역이 점점 확대되는 사이에 카르타고에서는 하밀카르 장군이 적을 토벌할 준비를 착실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에스파냐(이베리아 반도)에 눈독을 들이고 정부에 군대를 요청했으나 모험을 두려워하는 귀족들의 반대로 한 개 군대밖에 지원받지 못했다.
그러나 용장 하밀카르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는 '젊은 사자들', 즉 사위 하스드루발, 아들 한니발, 하스드루발(한니발의 동생), 마고 등 네 명을 신전에서 서약하게 한 뒤 에스파냐를 향해 출발했다.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카디스에 도착한 하밀카르는 8년간에 걸쳐 에스파냐 부족을 평정하면서 알리칸테에 도착했다. 그는 원주민을 복종시켜 자신의 군대에 흡수시켰다. 그러나 하밀카르는 전투 중에 강물이 불어난 강에서 부하를 구하려다 익사하고 말았다. 그의 뒤를 이어 군대를 이끌게 된 것은 사위 하스드루발이었다.
그는 동쪽 해안에서 가장 좋은 항구에 '신카르타고'(카르타고노바, 지금의 카르타헤나)를 건설하고 이곳을 기지로 철을 정련하고 무기를 만들어 상업을 독점하고 재정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는 8년에 걸쳐 전군을 통솔했는데 그 또한 자객에 의해 비운의 죽음을 맞았다. 그때 스물여섯 살의 젊은 나이에 카르타고의 장군이 되어 로마 군을 강하게 훈련시키는 천재적인 전략가가 바로 하밀카르의 큰아들 한니발 바르카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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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입니다. 괄호를 내용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포인트 한 장이 약 1만 자, 5천 토큰입니다. 어느 AI 창에도 그냥 들어갑니다. 잘라 붙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있습니다. 포인트 01·02 본문 45건을 사료와 대조해 심각한 오류 6건을 찾았습니다. 전투 승패가 뒤집힌 서술이 두 장에 하나꼴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기준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