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 15
팍스 로마나 1세기
30포인트 편역본
황제 네 명이 살해된 격동의 69년
로마를 '세계의 수도'로 만들려는 발상은 카이사르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에는 혈통에 숨겨진 '광기' 때문에 이것이 실현되지 못했다.
병사들이 상점에 난입하여 물건을 마구 훔쳤으며 심지어 매춘부와 자고 있는 적병을 살해하려다가 비텔리우스를 발견하고는 벌거벗은 채로 길거리로 끌고 나와 고문을 가한 후에 테베레 강에 던져버렸다.
이리하여 네로가 살해된 다음해인 69년에 베스파시아누스(69~79 재위)가 제9대 황제로 즉위했다. 황제 네 명이 살해된 이 1년은 '격동의 69년'으로 불렸다. 오물 범벅이 되어 죽음의 여행을 떠나는 황제, 곧바로 폭도로 변하여 약탈 방화를 서슴치 않는 군대, 그러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오락으로 여기며 즐기는 시민들, 이것이 69년 로마의 모습이었다.
그런 가운데 예순 살의 베스파시아누스는 10년 동안 꿋꿋하게 로마를 통치해 나갔다. 그는 군단과 재정의 재건에 힘쓰고 관위를 비싼 값에 팔았으며 시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뒀다. 또 그는 공중 화장실을 고안하여 시민들에게 사용 요금을 받았는데 시민들은 오히려 이를 고마워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에서는 공중 화장실을 '베스파시아노'라고 부른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최상의 통치를 한 베스파시아누스는 79년에 샘물을 마시고 복통을 일으켜 사흘 낮밤을 구토와 설사에 시달린 끝에 일어나더니, "황제는 서서 죽어야 위신이 선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후계자는 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불린, 장남 티투스(79~81 재위)였다. 천성이 유순하고 관대했던 그는 범죄자에게도 질책만 할 뿐 결코 사형을 언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범죄자의 어머니에게까지 안심하라는 전언을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제국 내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로마는 대화재에 휩싸였고 79년 8월 24일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대분화로 폼페이는 용암에 매몰되었다. 또한 이탈리아 전역에 역병이 만연하는 등 불행이 잇달았다.
티투스는 국고가 바닥 날 정도로 구원 사업에 힘을 기울였으며 직기접 간병에 나서느라 결국 역병에 감염되고 말았다. 제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만에 그는 마흔두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가 서거하자 모든 로마 시민들이 애도하며 슬퍼했다.
뒤를 이어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81~96 재위)가 제위를 이어받았는데 이 황제에 대한 평판은 찬반양론이었다. 형 티투스가 병으로 쓰러지자 빨리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몸에 눈을 퍼부었다는 설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대화재 이후의 수도 재건과 풍속의 규제 등 초기의 치세는 비교적 훌륭했다.
아그리콜라로마 제국의 영토를 북방 고지까지 확대하려고 시도한 장군.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파면당했다.
이날부터 그는 자신을 둘러싼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고 믿고는 신변 안전을 위한 황제 숭배를 강요했다. 그는 주옥을 여기저기 박은 황금 '옥좌'에 앉아서 전 시민에게 '주인 동시에 신이신 황제 폐하'라 부르게 하고 자신을 배알하는 사람에게는 발에 입을 맞추도록 명령했다.
황제는 미친 듯이 날뛰던 끝에 절명했는데, 그의 나이 쉰다섯이었다.
재정 수립과 동방 정복
네르바 황제는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추방된 자들을 불러들이고 토지를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유대인의 공납 의무를 면제해 주는 등 재정을 재건했다. 그러나 친위대는 전횡을 묵인하지 않는 네르바를 궁전에 감금하고 보좌관 몇 명을 두고 선제를 살해한 자를 인도하도록 요구했다. 네르바는 자신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면서 대항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견한 네르바는 게르마니아로 원정 보낸 트라야누스 장군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정하고 친위대의 움직임을 저지시킨 후에 치세 2년 만에 사망했다.
아폴로도로스는 수년 전에 트라야누스 황제의 명령을 받고 단 며칠 만에 도나우 강에 다리를 만들었다고 하는 '일야교 건축'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트라야누스 광장의 신전 앞에 파로스 섬에서 운반해 온, 한 개에 50톤이나 하는 거대한 대리석 18개로 대원주를 쌓아 올리고는 "이것이야말로 기적의 기둥이다!"라고 외쳤다.
고대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보다 스물네 살 연하였지만 두 사람 다 에스파냐 태생이었다. 그는 고향 대선배의 권유로 로마로 나와 수학, 의학, 철학, 문학, 조각, 기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양을 쌓았다.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종손녀인 비비아 사비나와 결혼했다. 그녀는 미인이긴 했지만 성적 매력이 없었기 때문에 정중하게 대하기는 했으나 동침을 피했다. 그리고 황비와 정을 통하게 되었다.
마흔 살에 즉위한 하드리아누스는 선제의 동방 정복을 종결시키고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에서 전군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이로 인해 군부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제국을 몰락시킬 자'라는 소문이 전 로마에 떠돌았다. 서둘러 귀국한 하드리아누스는 10억 세스테르티우스를 시민들에게 분배하고 세금을 감면해 주었으며 몇 주에 걸쳐 경기를 개최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시민들은 오히려 이것이 네로의 재현이 아닐까 하는 위기감이 들었다. 분명 하드리아누스는 네로처럼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렸으며 시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취미에는 한 점의 광기도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다만 그는 점성술을 진지하게 믿었고 운세나 일식, 조수 간만 따위의 미신을 믿으면서 "종교는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다"라고 확신에 찬 말을 했다. 그리하여 아폴로도로스에게 베누스 신전을 건축하도록 명했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황제는 분노한 나머지 그를 죽이고 자기가 직접 설계에 나섰다. 관료조직을 확립하기 위해 오랫동안 무질서하게 난립되었던 법률 체계를 정리하는 등 관리 업무에는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또한 그는 상당한 여행 애호가이기도 했다. 제국의 모든 영토를 파악하기 위해 최소한의 시종만을 이끌고 몇 차례나 여행을 했다. 때로는 현지 주둔군의 선두에 서서 싸웠으며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게르마니아에서는 원주민의 소박한 문화에 감동했고 브리타니아 북방에서는 '하드리아누스의 장성'을 쌓아 수비를 든든하게 정비했다. 에스파냐에서 이집트로 건너간 그는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청년 안티노우스를 동반하고 나일 강을 거슬러 여행을 떠났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로마 시민들은 모두 동요했다. 카이사르 이래 이집트 땅을 밟은 로마의 영웅들은 모두 '사랑의 비극'에 빠졌기 때문이다. 황비 사비나 역시 황제와 함께 여행을 했지만 황제는 언제나 안티노우스와 함께했다. 이 젊은이가 나일 강으로 떨어져 익사했을 때는 마치 연인을 잃은 여인처럼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안티노우스가 자신이 살지 않으면 황제의 사업이 성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그가 익사한 지점 근처에 신전을 짓고 안티노폴리스 시를 건설하여 이 젊은이를 제사 지내도록 했다.
만년에는 건축을 생의 보람으로 여겨 판테온 신전의 재전, 티볼리의 대별장, 테베레 강 대안의 산타젤로 성 등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걸작들을 만들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몸이 붓고 코피가 그치지 않는 병에 걸리자 친구인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나버리는 바람에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자신을 '정제', 그를 '부제'로 칭했다.
이것이 전례가 되어 이후에 차기 황제를 지명하는 데 있어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21년간 로마를 다스린 후 예순두 살에 영면에 들었다.
팍스 로마나의 실현
신중한 하드리아누스는 죽음에 임박하여 후계자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더불어 그의 양아들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해 두었다. 그리하여 이 두 황제의 치세를 '두 안토니누스 황제 시대'라 부른다.
138년에 즉위할 때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 재위)는 이미 쉰 살이 넘은 나이였다. 갈리아에서 이주한 자산가의 손자였던 그는 황제가 되자마자 곧바로 전 재산을 국고에 쏟아 부었기 때문에 제국의 자산은 제정 이래 최고 액수인 27억 세스테르티우스였다. 그러나 막상 자신은 무일푼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미인이자 음탕한 아내 파우스티나는 황비에 오르자 득의양양해져서 돈을 물 쓰듯 써댔다. 안토니누스는 그런 아내에게 단 한 번 주의를 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내가 죽자 기념 신전을 세우고 아내의 이름으로 빈곤층 자녀를 위한 장학금을 설정함으로써 그녀의 죽음을 기렸다.
황제는 선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법전 정비 작업을 지속해 나갔다. 그 결과 모든 시민들은 부부 간에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고문은 거의 폐지되었고 노예를 살상하는 것을 범죄 행위로 규정했으며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가 실현되었다.
너무나도 평화로운 나머지 황제와 원로원이 지나치게 양보하여 게르마니아에서는 오히려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황제가 통치하는 동안 평화와 질서로 인해 '영원한 이상'이 실현되는 듯했다. 실제로 로마 제국으로의 병합을 진정하기 위해 방문하는 세계 각국의 사절들이 끊이지 않았다.
일흔네 살에 처음으로 병(단순한 복통)에 걸린 안토니누스는 양아들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재위)를 머리맡으로 부르더니 "아들아, 이제 네 차례다"라고 말한 뒤에 돌아눕자마자 영면에 들어 23년간의 치세를 마쳤다.
당시 마흔 살이었던 양아들 아우렐리우스는 유아기에 부모를 잃고 원로원 집정관이었던 조부의 손에서 자랐다. 17명의 가정교사에게 학업을 이수하고 스토아 철학을 연구한 후에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열두 살부터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는 아무것도 깔지 않고 바닥에서 잠을 잤으며 극도의 절식과 철저한 금욕 생활을 했기 때문에 건강을 해치기도 했으나 그것조차도 신들에게 감사한다고 할 정도로 철저한 극기주의로 일관했다.
그러나 그는 경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래로 이어져온 법전의 정비는 계속되었지만 그 효과를 기대하기보다는 금욕 생활을 강화해서 신민들의 모범을 보이려고 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황제를 존경하는 한편 두려워했다.
이러한 황제의 태도는 즉시 변경으로도 전해졌다. 로마가 침체되어 있는 틈을 타고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 파르티아의 여러 민족들이 속주를 침범했다. 그러자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를 동방으로 파견했다.
루키우스는 하드리아누스가 제일 처음 후계자로 지명한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의 아들로서 안토니누스가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양자로 맞아들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여자들의 엉덩이만 쫓아 다니는 향락가였다. 아우렐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의사를 존중하여 딸 루킬라와 결혼시켜서 공동 통치할 것을 제의했지만 루키우스는 여전히 주색 잡기에만 빠져 있었다.
파르티아족루키우스 베루스의 동방군에 의해 격파된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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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롤을 따라 지도가 움직여요지명 37곳. 이름을 누르면 그 화면으로 갑니다. 테두리만 있는 점은 위치가 추정입니다.- 인물 — 갈바, 네로, 네르바, 도미티아누스, 루키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루킬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리우스 안토니우스, 베스파시아누스, 비비아 사비나, 비텔리우스, 사투르니누스, 아그리콜라, 아우구스투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안티노우스, 에파프로디투스, 오토, 카시우스, 카이사르, 콤모두스, 클라우디우스, 클레오파트라 7세, 타키투스, 트라야누스, 티투스, 파우스티나, 판테아, 플로티나, 하드리아누스
- 지명 — 갈리아, 게르마니아, 그리스, 나일 강, 도나우 강, 로마, 로마 제국, 메소포타미아, 베누스 신전, 베로나, 브리타니아, 비엔나, 셀리누스, 소아시아, 시리아, 아르메니아, 안티오키아, 에스파냐, 예루살렘, 유대, 이집트, 이탈리아, 이탈리아 반도, 인도, 인도양, 장안, 중국, 콜로세움, 크레모나, 터키, 테베레 강, 투르키스탄, 티볼리, 파로스 섬, 팔레스티나, 페르시아, 폼페이
- 사건 — 페스트균
- 시대 — 5현제 시대, 고대 로마,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 팍스 로마나
- 집단 — 검투사, 고트족, 그리스, 기독교, 기독교인, 다키아족, 로마 군, 브리타니아 민족, 원로원, 유대인, 친위대, 테우토니족, 파르티아족
- 제도 — 기독교
- 저작 — 명상록, 산타젤로 성, 트라야누스 광장, 판테온 신전, 하드리아누스의 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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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이어서 그냥 시키면 틀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