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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로마나 1세기

30포인트 편역본

황제 네 명이 살해된 격동의 69년

로마를 '세계의 수도'로 만들려는 발상은 카이사르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에는 혈통에 숨겨진 '광기' 때문에 이것이 실현되지 못했다.
원로원이라는 방패막을 등에 업고 네로 황제를 살해한 뒤 제위에 오른 에스파냐 속주 총독 갈바의 치세는 불과 3개월밖에 지속되지 못했다. 네로로부터 이익을 취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모든 재산을 국가에 환수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자 수입을 잃은 친위대가 갈바를 습격하여 살해했다. 곧바로 황제에 추대된 것은 은행가인 오토였다. 그러나 게르마니아로 원정을 가 있던 비텔리우스가 반란을 일으켜서 오토를 자살로 내몬 후 자신이 제위에 올랐다(69년).
그러나 비텔리우스는 이집트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전투 준비를 등한시했기 때문에 크레모나 쟁탈전에서 패하고 로마로 돌아와서는 은거지로 잠입하여 바깥 외출도 못하고 새끼양 요리를 즐기면서 주연에 취해 있었다. 한편 베스파시아누스의 군대는 로마로 진입하여 닥치는 대로 살육을 행했지만 시민들은 그 아수라장을 마치 전투경기 시합을 보듯 열광하며 구경했다.
병사들이 상점에 난입하여 물건을 마구 훔쳤으며 심지어 매춘부와 자고 있는 적병을 살해하려다가 비텔리우스를 발견하고는 벌거벗은 채로 길거리로 끌고 나와 고문을 가한 후에 테베레 강에 던져버렸다.
이리하여 네로가 살해된 다음해인 69년에 베스파시아누스(69~79 재위)가 제9대 황제로 즉위했다. 황제 네 명이 살해된 이 1년은 '격동의 69년'으로 불렸다. 오물 범벅이 되어 죽음의 여행을 떠나는 황제, 곧바로 폭도로 변하여 약탈 방화를 서슴치 않는 군대, 그러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오락으로 여기며 즐기는 시민들, 이것이 69년 로마의 모습이었다.
그런 가운데 예순 살의 베스파시아누스는 10년 동안 꿋꿋하게 로마를 통치해 나갔다. 그는 군단과 재정의 재건에 힘쓰고 관위를 비싼 값에 팔았으며 시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뒀다. 또 그는 공중 화장실을 고안하여 시민들에게 사용 요금을 받았는데 시민들은 오히려 이를 고마워했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이탈리아에서는 공중 화장실을 '베스파시아노'라고 부른다.
그는 또 아들 티투스유대로 파견하여 예루살렘의 폭동 진압을 맡겼다. 그러나 티투스는 거리에 불을 질러 대신전을 파괴했고 게다가 유대 왕가의 아름다운 공녀 베레니케를 데리고 귀국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최상의 통치를 한 베스파시아누스는 79년에 샘물을 마시고 복통을 일으켜 사흘 낮밤을 구토와 설사에 시달린 끝에 일어나더니, "황제는 서서 죽어야 위신이 선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후계자는 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불린, 장남 티투스(79~81 재위)였다. 천성이 유순하고 관대했던 그는 범죄자에게도 질책만 할 뿐 결코 사형을 언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범죄자의 어머니에게까지 안심하라는 전언을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제국 내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로마는 대화재에 휩싸였고 79년 8월 24일에는 베수비오 화산의 대분화로 폼페이는 용암에 매몰되었다. 또한 이탈리아 전역에 역병이 만연하는 등 불행이 잇달았다.
티투스는 국고가 바닥 날 정도로 구원 사업에 힘을 기울였으며 직기접 간병에 나서느라 결국 역병에 감염되고 말았다. 제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만에 그는 마흔두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가 서거하자 모든 로마 시민들이 애도하며 슬퍼했다.
뒤를 이어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81~96 재위)가 제위를 이어받았는데 이 황제에 대한 평판은 찬반양론이었다. 형 티투스가 병으로 쓰러지자 빨리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의 몸에 눈을 퍼부었다는 설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대화재 이후의 수도 재건과 풍속의 규제 등 초기의 치세는 비교적 훌륭했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실정을 하고 말았다. 브리타니아 총독인 아그리콜라로마 제국의 영토를 북방 고지(스코틀랜드)까지 확대하려고 시도했을 때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던 도미티아누스는 아그리콜라를 파면시켰다. 그러나 게르마니아의 다키아족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 군을 격파했기 때문에 평화주의자인 황제도 출정할 수밖에 없었다. 작전이 유리하게 전개되는 동안 게르마니아 총독 사투르니누스의 반란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서둘러 다키아족과 불리한 강화를 체결했다.
이날부터 그는 자신을 둘러싼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고 믿고는 신변 안전을 위한 황제 숭배를 강요했다. 그는 주옥을 여기저기 박은 황금 '옥좌'에 앉아서 전 시민에게 '주인 동시에 신이신 황제 폐하'라 부르게 하고 자신을 배알하는 사람에게는 발에 입을 맞추도록 명령했다.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신하는 추방했고 그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인은 참수했으며 음모를 두려워한 나머지 밀고를 장려했다. 타키투스 등 원로원의 유지가 암살을 기도하는 가운데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비서관 에파프로디투스가 25년 전에 네로 황제의 손을 경동맥으로 이끈 비서관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내고는 그를 사형에 처했다. 이에 전 관리가 동요하여 원로원과 함께 암살 조직을 결성하고 황비 도미티아까지 끌어들여 치세 15년째인 96년의 어느 날 밤에 암살을 결행했다.
황제는 미친 듯이 날뛰던 끝에 절명했는데, 그의 나이 쉰다섯이었다.

재정 수립과 동방 정복

도미티아누스가 살해되고 나서 원로원은 의원 가운데 변호사이자 시인으로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선량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던, 일흔 한 살이 넘은 네르바(96~98 재위)를 황제로 지명했다. 바로 이 황제로부터 5현제 시대가 시작되었다.
네르바 황제는 도미티아누스에 의해 추방된 자들을 불러들이고 토지를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유대인의 공납 의무를 면제해 주는 등 재정을 재건했다. 그러나 친위대는 전횡을 묵인하지 않는 네르바를 궁전에 감금하고 보좌관 몇 명을 두고 선제를 살해한 자를 인도하도록 요구했다. 네르바는 자신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면서 대항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견한 네르바는 게르마니아로 원정 보낸 트라야누스 장군을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정하고 친위대의 움직임을 저지시킨 후에 치세 2년 만에 사망했다.
게르마니아에 있던 트라야누스(98~117 재위)는 2년에 걸친 테우토니족과의 분쟁을 끝내고 100년에 비로소 로마로 돌아와 황제의 직무를 수행했다. 강건 용맹한 그는 황제의 권한을 남용하지 않고 언제나 원로원의 의향을 존중했다. 게다가 뛰어난 교양인이면서도 철학과 예술에만 빠져 있지 않고 실질적인 도시 정비를 실행하며 격무에도 잘 견뎌냈다. 전쟁에서도 절묘한 용병술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부하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검투사 1만 명이 참가하는 축하 경기를 4개월에 걸쳐 개최하여 전 시민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에 대해 특필할 만한 것은 대규모 공공 토목 공사였다. 트라야누스 시대의 도시 계획, 공학, 건축은 고대 로마사 최고봉에 자리하고 있다. 어마어마한 수도 공사, 오스티아(지금의 오스티아안티카) 신항구 건설, 4대 가도 정비, 베로나원형경기장 건조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것이 다마스쿠스 출신의 그리스인 천재 건축가 아폴로도로스가 트라야누스 광장을 완성한 것이다.
아폴로도로스는 수년 전에 트라야누스 황제의 명령을 받고 단 며칠 만에 도나우 강에 다리를 만들었다고 하는 '일야교 건축'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트라야누스 광장의 신전 앞에 파로스 섬에서 운반해 온, 한 개에 50톤이나 하는 거대한 대리석 18개로 대원주를 쌓아 올리고는 "이것이야말로 기적의 기둥이다!"라고 외쳤다.
이 토목 공사 중에서도 산이나 언덕 등을 깎아 만든 길과 다리를 포함한 도로 정비는 실크로드를 촉진했다. 이미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치세인 20년에 인도로 이어지는 통상로가 개통되었고, 25년에는 아우구스투스에게, 99년에는 트라야누스에게 인도 사절이 배알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시리아인인 마에스 티티아누스가 100년경에 투르키스탄까지의 노정을 확인했다.
한편 중국에서도 후한의 반초표제가 같은 시기에 중앙아시아로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도중에 대상화 도시에서 대거 옮겨 싣기는 했지만 비단과 향료, 도기 등이 주로 운송되는 장안(지금의 시안)·로마 간의 교역이 시작되었다.
이 통상에 자극받은 트라야누스는 예순 살이 넘은 나이였지만 전진욕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일찍이 카이사르가 의도했고 안토니우스가 착수한 동방 정복 계획을 자신의 손으로 완성하고자 했던 그는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시리아, 아르메니아 제국을 정복하여 로마의 속주로 만들고 마침내 인도양까지 이르렀다. 이것이 로마 제국사 최대의 판도였다.
그러나 트라야누스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인도와 중국까지 공격하려고 홍해에서 아라비아해를 건너는 외양 함대를 건조했지만 노쇠한 나이 때문에 단념해야 했다. 귀국하는 중에 정복지에서 반란이 끊이지 않아 그것을 진압하던 그는 악성 수종에 걸렸다. 그는 117년 로마로 귀환하는 도중에 소아시아셀리누스에서 경련을 일으켜 예순네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황제의 유골은 트라야누스 광장에 세워진 '기적의 대원주(기둥)' 아래에 묻혔다.

고대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후계자를 지명할 틈도 없이 세상을 떠난 트라야누스의 뒤를 이은 사람은 '고대 로마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라 불리는 하드리아누스(117~138 재위)이다. 사실 그는 트라야누스의 황비 플로티나의 애인으로서 간통으로 인해 즉위한 황제이다.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보다 스물네 살 연하였지만 두 사람 다 에스파냐 태생이었다. 그는 고향 대선배의 권유로 로마로 나와 수학, 의학, 철학, 문학, 조각, 기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양을 쌓았다.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종손녀인 비비아 사비나와 결혼했다. 그녀는 미인이긴 했지만 성적 매력이 없었기 때문에 정중하게 대하기는 했으나 동침을 피했다. 그리고 황비와 정을 통하게 되었다.
마흔 살에 즉위한 하드리아누스는 선제의 동방 정복을 종결시키고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에서 전군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이로 인해 군부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제국을 몰락시킬 자'라는 소문이 전 로마에 떠돌았다. 서둘러 귀국한 하드리아누스는 10억 세스테르티우스를 시민들에게 분배하고 세금을 감면해 주었으며 몇 주에 걸쳐 경기를 개최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시민들은 오히려 이것이 네로의 재현이 아닐까 하는 위기감이 들었다. 분명 하드리아누스는 네로처럼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렸으며 시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예술적 취미에는 한 점의 광기도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다만 그는 점성술을 진지하게 믿었고 운세나 일식, 조수 간만 따위의 미신을 믿으면서 "종교는 사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다"라고 확신에 찬 말을 했다. 그리하여 아폴로도로스에게 베누스 신전을 건축하도록 명했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황제는 분노한 나머지 그를 죽이고 자기가 직접 설계에 나섰다. 관료조직을 확립하기 위해 오랫동안 무질서하게 난립되었던 법률 체계를 정리하는 등 관리 업무에는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또한 그는 상당한 여행 애호가이기도 했다. 제국의 모든 영토를 파악하기 위해 최소한의 시종만을 이끌고 몇 차례나 여행을 했다. 때로는 현지 주둔군의 선두에 서서 싸웠으며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게르마니아에서는 원주민의 소박한 문화에 감동했고 브리타니아 북방에서는 '하드리아누스의 장성'을 쌓아 수비를 든든하게 정비했다. 에스파냐에서 이집트로 건너간 그는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청년 안티노우스를 동반하고 나일 강을 거슬러 여행을 떠났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로마 시민들은 모두 동요했다. 카이사르 이래 이집트 땅을 밟은 로마의 영웅들은 모두 '사랑의 비극'에 빠졌기 때문이다. 황비 사비나 역시 황제와 함께 여행을 했지만 황제는 언제나 안티노우스와 함께했다. 이 젊은이가 나일 강으로 떨어져 익사했을 때는 마치 연인을 잃은 여인처럼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안티노우스가 자신이 살지 않으면 황제의 사업이 성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탁을 받고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하드리아누스는 그가 익사한 지점 근처에 신전을 짓고 안티노폴리스 시를 건설하여 이 젊은이를 제사 지내도록 했다.
만년에는 건축을 생의 보람으로 여겨 판테온 신전의 재전, 티볼리의 대별장, 테베레 강 대안의 산타젤로 성 등 현재까지도 남아 있는 걸작들을 만들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몸이 붓고 코피가 그치지 않는 병에 걸리자 친구인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양자로 삼았다. 그러나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나버리는 바람에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자신을 '정제', 그를 '부제'로 칭했다.
이것이 전례가 되어 이후에 차기 황제를 지명하는 데 있어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21년간 로마를 다스린 후 예순두 살에 영면에 들었다.

팍스 로마나의 실현

신중한 하드리아누스는 죽음에 임박하여 후계자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더불어 그의 양아들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해 두었다. 그리하여 이 두 황제의 치세를 '두 안토니누스 황제 시대'라 부른다.
138년에 즉위할 때 안토니누스 피우스(138~161 재위)는 이미 쉰 살이 넘은 나이였다. 갈리아에서 이주한 자산가의 손자였던 그는 황제가 되자마자 곧바로 전 재산을 국고에 쏟아 부었기 때문에 제국의 자산은 제정 이래 최고 액수인 27억 세스테르티우스였다. 그러나 막상 자신은 무일푼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미인이자 음탕한 아내 파우스티나는 황비에 오르자 득의양양해져서 돈을 물 쓰듯 써댔다. 안토니누스는 그런 아내에게 단 한 번 주의를 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아내가 죽자 기념 신전을 세우고 아내의 이름으로 빈곤층 자녀를 위한 장학금을 설정함으로써 그녀의 죽음을 기렸다.
황제는 선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법전 정비 작업을 지속해 나갔다. 그 결과 모든 시민들은 부부 간에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고문은 거의 폐지되었고 노예를 살상하는 것을 범죄 행위로 규정했으며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가 실현되었다.
너무나도 평화로운 나머지 황제와 원로원이 지나치게 양보하여 게르마니아에서는 오히려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황제가 통치하는 동안 평화와 질서로 인해 '영원한 이상'이 실현되는 듯했다. 실제로 로마 제국으로의 병합을 진정하기 위해 방문하는 세계 각국의 사절들이 끊이지 않았다.
일흔네 살에 처음으로 병(단순한 복통)에 걸린 안토니누스는 양아들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재위)를 머리맡으로 부르더니 "아들아, 이제 네 차례다"라고 말한 뒤에 돌아눕자마자 영면에 들어 23년간의 치세를 마쳤다.
당시 마흔 살이었던 양아들 아우렐리우스는 유아기에 부모를 잃고 원로원 집정관이었던 조부의 손에서 자랐다. 17명의 가정교사에게 학업을 이수하고 스토아 철학을 연구한 후에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열두 살부터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는 아무것도 깔지 않고 바닥에서 잠을 잤으며 극도의 절식과 철저한 금욕 생활을 했기 때문에 건강을 해치기도 했으나 그것조차도 신들에게 감사한다고 할 정도로 철저한 극기주의로 일관했다.
그러나 그는 경제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래로 이어져온 법전의 정비는 계속되었지만 그 효과를 기대하기보다는 금욕 생활을 강화해서 신민들의 모범을 보이려고 했기 때문에 시민들은 황제를 존경하는 한편 두려워했다.
이러한 황제의 태도는 즉시 변경으로도 전해졌다. 로마가 침체되어 있는 틈을 타고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 파르티아의 여러 민족들이 속주를 침범했다. 그러자 아우렐리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를 동방으로 파견했다.
루키우스는 하드리아누스가 제일 처음 후계자로 지명한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의 아들로서 안토니누스가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양자로 맞아들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여자들의 엉덩이만 쫓아 다니는 향락가였다. 아우렐리우스는 하드리아누스의 의사를 존중하여 딸 루킬라와 결혼시켜서 공동 통치할 것을 제의했지만 루키우스는 여전히 주색 잡기에만 빠져 있었다.
동방정토군 대장인 루키우스는 안티오키아(지금의 터키 남부)에서 가히 클레오파트라의 재림이라 할 만한 판테아라는 미녀를 만나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사정도 말하지 않고 새로운 작전 계획을 동방군 참모인 카시우스에게 보내 격려했기 때문에 로마 군은 멋지게 파르티아족 군대를 격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개선해서 돌아온 루키우스가 이끄는 동방정토군은 적장의 시체와 함께 전염병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페스트균이었다. 재앙은 곧바로 닥쳐왔다. 사람들의 몸속에 농이 생기면서 악취를 풍겼다. 로마 시에만도 사망자가 20만 명이었고 이탈리아 반도 전 지역으로 확대되어 갔다. 사람들은 이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들이 살던 마을을 떠났다.
그후에 곧바로 게르마니아에서 전투가 재개되어 아우렐리우스는 황자 콤모두스를 데리고 출장하여 승리했지만 비엔나(빈)에서 병으로 쓰러졌다.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던 황제는 6일째에 일어나서 콤모두스에게 양위를 표명한 뒤 침대로 돌아가 잠자듯이 죽음을 맞이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가 남긴 『명상록』은 스토아 철학의 정수, 고대 로마 최고의 도덕 독본으로서 지금도 널리 읽혀지고 있다. 그는 다섯 명의 황제가 밝힌 '로마의 양심'의 등불이 꺼져버리려고 할 때 다시 한번 환하게 비춘 빛이었다. 그 이후부터 로마는 다시 음모와 쟁탈, 살육과 피폐로 얼룩진 무질서의 세계로 전락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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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입니다. 괄호를 내용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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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포인트 01·02 본문 45건을 사료와 대조해 심각한 오류 6건을 찾았습니다. 전투 승패가 뒤집힌 서술이 두 장에 하나꼴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기준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