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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부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왜 로마 최후의 황제로 불리는가
30포인트 편역본
이제 더 이상 로마는 '영원의 도시'로 불려질 수 없었다.
즉위해서 서거할 때까지 유스티니아누스는 로마 제국을 38년 이상 통치했다. 그의 재위 기간에 일어난 사건들은 종류의 다양함은 물론 그 중요성 면에서도 다른 황제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한 획을 긋고 있다. 기번
유스티니아누스황제 · 482~565농민 출신 백부 유스티누스의 조카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어 38년 이상 통치했으며 제국의 영토를 회복하고 로마법 대전을 완성한 최후의 로마 황제.

농민에서 황제가 된 유스티누스

기번은 서로마 제국의 종말을 끝으로 「로마 제국 쇠망사』를 완결지을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진정한 로마 제국은 동서양 제국이 존재하던 시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발간된 『로마 제국 쇠망사』가 베스트셀러 행진을 계속했고 그 다음 시대의 역사까지 써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여 결국 기번은 그 이후의 이야기까지 쓰게 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황제를 사칭하던 야만족의 수령이 황제를 추방함으로써 멸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미 야만족의 속국으로 전락한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동로마 제국 주민들에게 아무런 감회도 주지 못하는 사건이었다.
야만족에게 멸망당한 서로마 제국과는 달리 동로마 제국은 지속적인 번영을 누리며 놀랍게도 15세기까지 생명을 연장했다. 동로마 제국을 통치한 수많은 황제 가운데서도 특필할 만한 인물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527~565 재위) 황제이다.
여기에서 그의 위업을 언급하기 전에 바로 전 황제이자 그의 숙부이기도 했던 유스티누스 황제에 대해 언급해 보아야 한다.
유스티누스황제 · 450~527농민 출신으로 직업 군인의 길을 걸어 68세에 황제가 된 유스티니아누스의 백부. 정치에 무능했지만 뛰어난 재무관 덕분에 장기간 통치했다.
유스티누스는 소피아의 폐허 부근의 보잘것없는 지방 농민이었다. 그는 직업 군인으로 출세하기 위해 같은 마을에 사는 두 명과 함께 마을을 떠났다. 농민 출신의 일개 병졸이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가 된 것이다. 로마 제국처럼 엄격한 신분제도가 확립되어 있는 사회에서도 하극상이 가능했던 것이 의외의 사실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유능한 사람이라면 설사 그것이 패자이든 신분이 낮은 노예이든 상관없이 등용하는 관대함을 지니고 있었다.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르코스도 로마가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번영할 수 있었던 이유로, "패자조차도 자신들과 동화시키는 그들의 삶의 방식에 있었다"고 단언했다. 당시의 패자란 단순히 전쟁에서 패한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패자는 다시 말해서 노예였다.==
노예의 자손이나 후예가 원로원 의원이나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일이지만 로마에서는 일상 다반사였다. 뿐만 아니라 저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로마 건국 초기 패자의 자손이었다.
유스티누스는 두 친구와 함께 비스킷 몇 개만을 손에 쥐고 마을을 떠나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큰 키와 완력을 인정받아 레오(1세) 황제의 근위병으로 발탁되었고 이어지는 2대 황제 곁에서 운 좋게도 부와 명예를 누리는 지위에까지 올랐다.
실력만으로 정상에 오르기란 불가능하다. 거기에는 카리스마와 행운, 그리고 때로는 기적이 요구될 때도 있다. 이어지는 전쟁의 위험한 상황 속에서 몇 번이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황제를 지켜주는 수호천사의 가호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유스티누스는 그런 행운과 기적에 힘입어 제위로 향한 계단을 하나씩 올라갔다.
유스티누스는 당시 궁정 내의 지배자였던 환관 아만티우스가 건네준 거액의 자금을 이용하여 황제 선출에 입후보했다. 이때 입후보한 사람은 유스티누스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입후보자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황제가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병사와 성직자, 그리고 시민들로부터 존경과 인기를 얻고 있었다. 즉, 로마 제국의 총의해호로써 제위를 받은 것이다. 68세라는 고령의 나이에 말이다.
아만티우스환관궁정 내의 지배자였던 환관. 유스티니아누스의 후계 지명에 걸림돌이 되자 음모죄를 뒤집어쓰고 참수당했다.
일개 병사가 제위에까지 오른 것은 실로 기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유스티누스는 사실 황제의 그릇은 못 되었다. 황제가 되기 전 그가 독단적으로 무언가를 결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면 신하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통감했을 것이다. 그는 50년 간에 걸쳐 전쟁을 계속했다. 그는 정치를 몰랐으며 글을 쓰기는커녕 읽을 줄도 몰랐다. 병사로서의 오랜 경험은 그에게 제국 통치에 대한 지혜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로마 제국의 오랜 역사에서 유스티누스 황제보다 훨씬 더 유능한 황제들이 암살되었고 옥좌에서 강제로 물러나야 했던 황제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오랫동안 황제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곁에 뛰어난 재무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두머리의 유무능을 떠나서 그 곁에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는 유능한 부하가 없다면 혼자 힘만으로는 조직을 제어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다. 이런 이유로 이 '무능'한 황제는 중도에 폐위되는 일 없이 황제 직을 마칠 수 있었다.

제위를 방해하는 라이벌 제거

유스티니아누스가 마을을 떠나 콘스탄티노플로 이주한 것은 막 친위대장이 되었을 때였다. 그는 동향인 백부 유스티누스의 배려로 황제의 호위를 맡게 되었고 거기서 차츰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유스티누스가 황제에 오르자 두 사람은 라이벌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제거한 것은 아만티우스였다. 아만티우스는 자신의 부하 병사 중에서 가장 무능해 보이는 유스티누스를 돈으로 매수하여 황제의 앞잡이로 만들 작정이었다.
그러나 유스티누스는 무능한 인물이긴 했지만 황제의 앞잡이로 만족할 인물은 아니었다. 게다가 유스티니아누스가 후계자로 지명되는 데 아만티우스는 걸림돌이 되는 존재였다.
두 사람은 적당한 음모죄를 뒤집어 씌워서 그를 체포했다. 그리고 판사에게는 그가 이단 마니교 신자라고 말했다. 당시에 이단교의 활동은 중죄에 해당했다. 아만티우스는 참수를 당했고 그의 동료였던 궁정의 시종관 세 사람도 사형, 또는 유형에 처해졌다.
제거해야 할 또 한 사람은 강력한 야만족 군대의 수령으로서 민중들의 인기를 얻고 있었던 비탈리아누스였다. 그는 집정관과 총사령관의 칭호를 받은 지 7개월째 되던 날 황제가 주관하는 만찬회 석상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 그의 관직을 이어받은 것은 물론 유스티니아누스였다. 그는 암살자라는 혐의를 받기는 했지만 처벌받지는 않았다.
비탈리아누스군 사령관강력한 야만족 군대의 수령으로 민중의 인기를 얻고 있던 인물. 황제 주관 만찬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
제국군의 총사령관이 된 유스티니아누스는 스키타이와 페르시아에서 화려한 전과를 올렸지만 제국민의 갈채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것은 유스티누스 황제의 유일한 특색이자 장점이었던 '전공매매'을 범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그는 교회와 원로원, 그리고 시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단교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취하자 교회는 그에게 호의를 품었다. 또 성직자나 수도사를 선물로 매수했으며 교회는 미래의 황제를 위해 기도하도록 민중들을 부추겼다.
그는 자신과 민중을 만족시키기 위해 집정관 취임식을 화려하게 거행했다. 원형경기장에는 사자 스무 마리와 표범 서른 마리를 풀어놓았으며 이어서 열린 마차 경기에서 이긴 자에게는 상품으로 말을 하사했다. 일설에 따르면 이 취임식에 금화 28만 8천 개 분량의 금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화려한 취임식으로 인해 그는 계획했던 민중의 비위를 맞추는 데 성공했으며 다른 나라의 왕들로부터 칭송받기도 했다.
서서히 권력을 집중시킨 유스티니아누스는 제국에 있는 금을 아낌없이 사용하여 원로원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원로원은 늙은 유스티누스에게 "유스티니아누스를 공동 통치자로 등용하라"는 조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그 말이 곧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 유스티누스는 원로원 의원에게 "황제는 선거를 통해 선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황제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유스티니아누스에게 황제의 칭호를 내렸다.
마침내 유스티니아누스에게도 수호천사의 가호가 찾아왔다. 유스티누스 황제의 심신이 쇠약해지면서 후견인의 원조가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황제는 마지못해 총주교와 원로원 의원을 소집해서 그들 앞에서 제관을 조카의 머리 위에 씌웠다. 그때 유스티니아누스의 나이는 마흔다섯 살이었다.

황제를 구한 황비 테오도라

유스티니아누스가 치세 기간 동안 행한 모든 일들은 콘스탄티노플의 민정 총독으로 숭진한 프로코피우스가 세세하게 기록해 두었기 때문에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프로코피우스장군 · 500~565콘스탄티노플의 민정 총독이자 역사가. 유스티니아누스의 치세를 상세히 기록하여 현대에 전해지고 있다.
참고로 프로코피우스는 기번이 가장 많이 참고한 책의 저자이다. 그러나 기번의 책에서 그의 이름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프로코피우스는 490년 전후에 태어나 527년 페르시아 전선에서 장군 벨리사리우스의 비서관이 되었고 그후 많은 전투를 목격해 왔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민정 총독으로 활동하다가 565년에 사망했는데, 그 동안 「전사맛」, 「비사8보」, 「건축에 대하여」, 『유스티니아누스 전사7:2」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벨리사리우스장군 · 505~565유스티니아누스의 동방 전선 군사령관. 니카의 반란 진압과 제국의 영토 회복에 주도적 역할을 한 장군.
제노, 아나스타시우스 황제 등이 비축해 준 재력을 바탕으로 위대한 로마 제국의 부흥을 오래도록 꿈꾸어 왔던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가 되어 드디어 그것을 실현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532년에 막상 실행에 옮기려 하자 콘스탄티노플의 시민들이 경마장에서 대규모의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을 일컬어 '니카의 반란'(니카란 경기장에서의 응원 구호로 '무찔러라, 이겨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니카의 반란사건유스티니아누스 시대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난 대규모 폭동. 청파와 녹파의 항쟁이 원인이었으며 약 3만 명이 처형되었다.
일반적으로 이 폭동은 유스티니아누스가 시민에게 부과한 중세가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청파와 녹파 사이에 일어난 항쟁과 대신시모들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다. 청파와 녹파 간의 항쟁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겠지만 이 두 당이 서로 격렬하게 반목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
청파집단경기장 마차 경기를 응원하는 청색 당파. 니카의 반란 당시 녹파와 함께 폭동을 일으켰다.
황제와 시민 간의 격렬한 싸움은 되풀이되었다. 결국 그들은 황제에 대한 충성 거부를 선언하고 "유스티니아누스의 아버지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한탄하며 황제에게 '살인자', '멍청이', '파렴치한 압제자' 등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녹파집단경기장 마차 경기를 응원하는 녹색 당파. 니카의 반란 당시 청파와 함께 폭동을 일으켰다.
"너희들이 진정 죽고 싶은 게로구나!" 격노한 황제는 이렇게 외쳤다. 그리고 사람들은 분노에 몸을 맡긴 채 "니카(승리하자)!"를 외쳤다. 적의에 찬 노호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콘스탄티노플은 그들이 일으킨 폭동에 의해 초토화되었다. 소피아 성당을 포함하여 많은 건물들이 잇달아 파괴되었고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와 미술품을 잃었다. 돈 많은 시민들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로 도망쳤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도 탈주를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그때 황비 테오도라는 황제를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테오도라황후 · 500~548경기장 사육사의 딸에서 황비가 된 여성. 니카의 반란 때 황제를 독려하여 위기를 극복하도록 한 결정적 인물.
=="도망치는 것 이외에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다 해도 저는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한번 황제가 된 사람은 도망친다고 해도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저는 여왕이라고 불리지 못할 바에는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떠나시겠다면 당신 혼자 배에 오르세요. 그러나 비참한 방랑자가 되어 결국에는 길거리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제위는 영광스러운 묘지가 되리라'라는 격언을 저는 믿습니다."==
이 말을 듣고 황제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한 황제는 동방으로 파견되어 있던 장군 벨리사리우스를 불러들어 폭동을 일으킨 시민들이 모여 있는 경기장을 공격하여 사태를 가까스로 수습했다.

제국의 영토를 회복하고 『로마법 대전』을 남긴 최후의 황제

반란을 진압하고 제국의 기반을 조금씩 굳혀나가기 시작한 유스티니아누스는 다음해에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벨리사리우스 장군에게 주변국들을 제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먼저 아프리카의 구카르타고에 있던 반달 왕국을 멸망시키고 왕위 계승 쟁탈전을 벌이던 서고트 왕국이 지배하고 있던 에스파냐 남부의 영토 일부를 획득했다.
반달 왕국집단아프리카 구카르타고에 있던 야만족 왕국. 유스티니아누스의 명령으로 벨리사리우스에 의해 멸망당했다.
순풍에 돛 단 듯이 전승을 거두어 가던 로마 군은 시칠리아와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동고트 왕국과의 전투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오랜 기간 이어진 전투 중에 벨리사리우스를 경질하고 환관 나르세스에게 지휘를 맡기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20년에 걸쳐서 간신히 이전 수도였던 로마를 포함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야만족으로부터 탈환할 수 있었다. 이로써 유스티니아누스는 지중해를 다시 로마 제국의 내해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서고트 왕국집단에스파냐를 지배하던 야만족 왕국. 왕위 계승 쟁탈전 중 제국군이 남부의 영토 일부를 획득했다.
그러나 20년에 걸쳐 격렬한 전투를 치른 로마는 사람들이 근접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졌다. 그후 로마는 속주에 편입되었지만 주도가 되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로마는 영광스러운 로마 제국을 재현하려고 했던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멸망하고 만 것이다.
동고트 왕국집단시칠리아와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야만족 왕국. 유스티니아누스 제국과 20년에 걸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공식적으로는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로마 제국은 재생되었다. 그러나 이 광대한 영토를 유지할 힘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너무 오랜 기간 전쟁을 치르느라 국고에 수납된 수천 톤의 금과 은이 사라져버렸고 국고를 다시 채우기 위해 사람들에게 중세를 부과했다. 그가 남긴 부채는 이후의 황제들에게도 무거운 부담을 안겨주었다.
나르세스환관 장군 · 478~574환관으로 벨리사리우스 이후 동고트 왕국과의 전투에서 제국군의 지휘를 맡아 이탈리아 탈환을 완성했다.
한편 유스티니아누스가 이룬 또 하나의 위업이 전해지는데, 그것은 바로 『로마법 대전』 이다. 528년에 유스티니아누스는 10명의 편찬위원에게 로마법을 집대성하도록 명령했다. 『로마법 대전』은 다음과 같이 4부로 구성되어 있다.
① 학설집:종래 고전법학자의 학설을 모아 수정한 것(전50권). ② 법학제요:법학생의 교과서로서 편찬된 것(전4권). ③ 칙법집:하드리아누스 황제 이래 역대 황제의 법을 모아 정리한 것(전12권). ④ 신칙법:514년 이후, 황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발표된 158개 칙법을 모은 것.
놀랄 만한 것은 지금까지 유럽의 법률학이 이 『로마법 대전』을 토대로 구축되었다는 것이다.
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저명한 건축가에게 명하여 '니카의 반란'으로 소실된 소피아 대성당을 재건한 것으로도 이름을 남기고 있다. 이 소피아 대성당은 약 6년에 걸쳐 완성되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스탄불에서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그는 야만족에게 유린되었던 제국의 영토를 회복하고 지중해를 다시 한번 '로마의 바다'로 만들었다. 또 『로마법 대전』이나 소피아 대성당과 같은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이것이 유스티니아누스가 '최후의 로마 황제'로 불리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는 565년에 후계자 지명도 하지 못한 채 병사했다.
이 포인트에 서술이 딸린 인물·집단이 15이라, 관계가 많이 얽힌 14만 옆에 세웠습니다. 나머지는 본문 링크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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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사진과 연대는 우리 자료가 아니라 위키미디어·위키데이터에서 따로 받아온 것이라 사람마다 있고 없고가 갈립니다. 인물 262명 중 사진은 164명, 생몰 연대는 168명에게 있습니다. 없는 자리는 지어내지 않고 비워 둡니다.이어서 Ab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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