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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로 보급된 식량과 오락

30포인트 편역본

무료 밀 배급 정책

로마 시대를 묘사하고 있는 책에는 반드시 '빵과 서커스'라는 단어가 나온다. 기번도 『로마 제국 쇠망사』 제10장에서 '빵과 서커스'와 '대경기장 행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문화는 언제 어떤 형태로 시작된 것일까.
'빵'이란 식량 무료 배부라는 사회복지 정책으로서 공화제 시대인 기원전 123년에 호민관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만든 '소맥법'에서 비롯되었다. 매년 수확되는 일정량의 밀을 정부가 사들여 시가의 절반 가격으로 도시의 노동자들에게 팔도록 규정한 법률로서 이른바 빈민구제책이었다. 따라서 이 특전을 받은 노동자는 모두 민중파를 지지했다.
그러나 40년 뒤에 원로원파인 술라가 독재관에 취임하여 '소맥법'을 철폐했다. 그러다가 카이사르의 외가 쪽 아저씨뻘 되는 민중파의 집정관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기원전 75년에 수혜자의 수를 4만 명이 하로 제한한다는 조건으로 '소맥법'을 부활시켰다. 이후에는 원로원파가 다시 철폐하고 민중파가 32만 명에게 무료 배포하는 등 이 법은 악순환을 되풀이했다.
카이사르가 무료 배부 대상을 15만 명으로 시작한 이후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것을 20만 명으로 늘였고 제정 시대에는 거의 같은 수준에 머물렀다.
로마의 인구는 약 100만에서 160만 명 정도였다. 무료 식량 수령 대상자는 17세 이상의 '수도 거주 로마 시민권 소유자'였기 때문에 1가구당 5~6명 정도라고 한다면 원로원 의원에서 공장 노동자까지 모든 성인 남자가 국가로부터 '밀 수급 증명서'를 받은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일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매일 빵을 먹을 수 있었다.
밀 배급량은 매달 한 사람당 5모디우스(약 32.5킬로그램)였기 때문에 한 가구에 아버지와 아들, 즉 성인이 둘이라면 65킬로그램을 받았다.
배급받은 밀은 야채와 치즈를 넣어 끓여 먹든지 아니면 가루로 빻아서 먹어야 했는데 어느 방법을 택하든지 비용이 들었다. 그때 드는 비용은 개인이 충당해야 했다.
또 곤궁에 처한 시민들에게는 1년에 5개월간 베이컨을 지급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흉작이 든 해에도 백만 도시 로마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이 제도는 서서히 지방 도시 및 속주의 라 시에까지 확산되어 나갔기 때문에 저 광대한 로마 제국에서 굶어 죽는 사람은 생겨나지 않았다.

전차 경주와 축제가 끊이지 않는 나라

밀 수급 증명서'는 갖은 행사의 무료입장권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으므로 시민권을 가진 모든 남성들은 축제일에 신에게 봉헌하는 의미로 개최되는 체육경기, 투기해, 연극, 음악회 등에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 시대에는 축제일수가 1년에 65일 전후였고, 2세기의 5현제 시대에는 120일 정도, 5세기에는 175일에 달했다.
이런 오락의 기원은 매우 오래된 것이었다. 기원전 6세기의 제5대 왕인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왕이 전승기념으로 만든 것이 고대 로마원형 대경기장(키르쿠스 막시무스, 서커스의 기원)의 원형이 되었다. 후에 카이사르가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했지만 경주로가 세로 600미터, 가로 150미터, 둘레 1500미터에 이르는 규모는 변함이 없었다. 수용 인원은 처음에는 수만에서 10만 명 정도, 제정 중기에는 25만~38만 명이었던 것을 보면 로마 시민의 4분의 1은 늘 경기를 즐긴 셈이었다.
게다가 기원전 221년에는 세로 400미터, 가로 260미터의 키르쿠스 플라미니우스, 제정 초기 칼리굴라 황제 시대에는 세로 180미터, 가로 90미터의 키르쿠스 경기장 두 개가 만들어져 병용되었기 때문에 전 로마 시민이 동시에 경기를 관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형 대경기장에서 열리는 경기는 두 마리, 또는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 경주였다. 모든 전차는 적을 앞지르기 위해 먼저 공격하기도 하고 맞붙어 싸우기도 하면서 격렬하게 부딪쳤다.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말과 전차를 모는 기술을 겨루는 경기였다.
왕정 시대의 경주는 신들에게 바치는 신사로서 정무관(제정기부터는 황제)이 주재하는 국가 행사였지만 서서히 오락의 형태를 띠면서 카이사르 때부터는 관보에까지 시합의 예상과 전평을 실었기 때문에 가정, 학교, 광장, 목욕탕, 심지어 원로원에서까지 경기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즉, 오늘날의 신문이나 TV가 야구나 축구 경기의 인기를 부추기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유력한 후원자나 시민들이 지원하는 프로팀은 처음에는 적색과 백색 두 조로 나뉘었는데 제정 시대가 되자 청색과 녹색조가 추가되었고 해당 조와 같은 색의 유니폼을 입은 열두 대의 전차가 출장하여 상품과 상금을 놓고 겨루었다. 그중에서 적색조와 녹색조가 가장 인기를 끌었다.
축제일에는 20만 명이나 되는 남자들이 대경기장으로 몰려가서 자신들이 후원하는 팀의 손수건을 사고 가까운 유곽에 들러 술을 한잔 마신 후에 여자들과 즐겼다. 장내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출전하는 말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빵 등의 간식과 방석을 받고 담당자에게 팁을 던져주었다. 그런 후에는 자신이 가진 돈을 남김없이 걸었다. 오늘날의 경마 팬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고관이나 부자들은 대리석으로 만든 특별석, 서민들은 목제로 된 보통석에 앉아서 기수가 혼자 말을 타는 경마와 2두와 4두 전차에 두 명의 기수가 타는 경마가 교대로 행해지는 경기를 즐기면서 마차의 삐걱거림과 말의 울음 소리에 취해 있었다. 그중에는 단주천로 24년간에 걸쳐 1064회나 승리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한편 로마 시민들은 연극에도 열광적이었다. 공화제 말기까지는 신화를 소재로 한 고전극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제정 시대가 되자 그러한 것들은 상류 살롱에서 낭독되는 것에 그치고 극장 무대에서는 배우가 감정 표현을 위해 과장된 연기를 펼치는 '대연극'이 유행했다. 이것은 후에 중세 유럽의 사육제극이나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키에도 도입된 것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주변의 속주에서 로마로 연극을 구경하러 오는 외국인들이 늘어나자 라틴어 대사 없이 얼굴 표정, 몸동작과 춤만으로도 연극의 줄거리를 알 수 있는 이른바 판토마임이 유행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판토마임을 흉내냈고 칼리굴라 황제도 매일 아침마다 판토마임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명배우들의 인기는 가히 절대적이었다. 연극배우들은 세련된 글이나 그림을 나누어 주면서 팬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몰아넣었고 상류 사회의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여배우는 무대나 거리에서 마음껏 교태를 부리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로마 제국을 열광시킨 글래디에이터

로마 시민을 가장 열광시킨 것은 '유혈 오락'인 검투사 경기였다. 처음에는 신전 앞이나 광장에서만 개최되던 이 경기는 규모가 커지면서 세 곳의 경기장에서 열리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80년에 완성되어 지금도 로마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콜로세움(원형경기장)이다.
이것은 72년에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에 있던 인공 연못을 다음 황제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메운 후 그 자리에 건설한 것으로서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치세 기간인 80년에 완성되었다. 이후 큰 경기는 항상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그후 콜로세움은 제국 영역의 여러 도시에 건설되어 폼페이, 카푸아, 님(지금의 프랑스 남부 도시), 아를 등지에도 유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들 콜로세움도 수용 한도가 5만 명이었기 때문에 대경기장의 관객 동원 수에는 미치지 못했다. 검투사는 노예나 사형수, 외국인 포로들을 모아 교외의 전문 양성소에서 훈련을 시켰는데 때때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과 같은 폭동이나 소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차츰 뛰어난 검투사에게 명예와 보수, 그리고 자유가 부여되자 시민들 가운데서도 지원하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경기를 개최할 때마다 검투사 수백 명이 콜로세움에 모여 아레나(그라운드)의 지하에 설비된 연습장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경기는 '맹수와 맹수', '사람과 맹수', '사람과 사람'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장경 188미터, 단경 54미터의 타원형 아레나는 물로 채울 수도 있었고 사막이나 정글 풍으로 꾸밀 수도 있었다.
본경기에 앞서 선보이는 구경거리는 동물들의 대행진으로 코끼리, 호랑이, 사자, 표범, 곰, 늑대, 악어, 하마, 기린, 살팽이 등 모든 영토에서 집결된 1만 마리의 동물들이 역사적인 인물로 분장하여 천천히 행진하는 것이다. 행진이 끝난 후에는 분장한 채로 투기를 벌이다가 하나씩 쓰러지면서 동물의 수도 점점 줄어들어갔다. 그러면 이어서 투우 경기가 펼쳐졌다.
카이사르가 크레타 섬에서 처음 이 경기를 관람하고는 열광하여 로마에 도입한 것이 시초였는데, 로마 시민들도 보자마자 일제히 열광했다. 그러나 제정 시대가 되어도 노예와 사형수들이 주를 이룬 투우사의 기술은 여전히 서툴러서 맹수에게 죽임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투우는 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마지막 순서는 '사람과 사람'이 벌이는 검투 시합이었다. 검투사는 대부분 사형수들이었지만 출전자의 수가 부족할 때는 경범죄인에게 사형을 선고하고는 참가하게 했다. 그리하여 수백 명의 투사들이 아레나의 모래를 피로 물들였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주재하에 치러진 어느 해의 대회에서는 1만 명의 검투사가 참가하여 8일 내내 시합을 치렀고 최후의 몇 명만이 남을 때까지 서로 죽고 죽이는 살상 행위가 계속되었다. 병사들은 아레나에 쓰러져 있는 검투사들을 쇠갈퀴로 찔러 생사를 확인한 후에 목을 잘랐으며 노예들이 시체를 들고 나가면 새로운 모래를 깔아 깨끗하게 정리했다.
검투사라고는 하나 사용하는 무기는 창, 낫, 화살, 도끼 등 다양했으며 이 무기들은 검투사들이 손으로 직접 만든 것이었다. 계속 승리하는 검투사는 시민들의 영웅이 되었고 그들에게 시인은 송가를, 조각가는 초상을, 귀빈석의 귀부인은 사랑을 바쳤으며 호사스러운 연회에 초대되기도 했다. 설령 패세가 짙다 해도 용감성과 기술이 인정되면 모든 관객들이 끊임없는 박수 갈채를 보냈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칭송해 주었다. 그런 경우에는 시합이 중단되었고 부상을 입었다 해도 살아남아 승자와 똑같은 영예가 주어졌다. 로마 제국에서 이러한 인간 살육의 향락은 빠트릴 수 없는 국가 행사였다.
여러 행사 가운데 대규모의 전투 오락으로 발전된 것이 모의 해전이었다. 이것은 신화나 역사상의 유명한 해전을 재연하여 로마인의 용기와 작전의 묘미를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교육적 가치'에 입각하여 연출된 살육전이었다.
소규모의 모의 해전은 공화제 말기부터 행해져 왔는데 이것을 대대적인 오락으로 완성시킨 것은 클라우디우스 황제였다. 뛰어난 역사가이기도 했던 그는 로마 해군이 참여했던 모든 해전에 정통한 인물이어서 푸키누스 호수 간척사업을 계기로 해전을 재현한 전투 경기를 로마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개최할 계획을 세웠다.
이 경기는 사형수 2만 명이 홍백으로 나뉘어 서로를 죽이는 방식으로 치러졌는데, 경기 도중에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호수 위를 뗏목으로 둘러싸 놓았다. 해병으로 분장한 수인들은 장갑선 두 대에 각각 나누어 탔다. 그리고 배를 젓고 키를 조종하면서 쇠뇌와 투석기를 쏘아대고 뱃머리를 맞대어 상대의 배로 뛰어들어가 검으로 서로를 찔러 죽였다.
양측 배후의 언덕에서는 장군 복장을 한 클라우디우스와 금실로 짠 그리스풍 외투를 걸친 황후 아그리피나가 군대를 지휘했다.
전사는 "황제 폐하여! 죽음을 앞두고 인사드립니다!"라고 부르짖으며 열심히 싸우다가 마침내 호수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후 이 모의 해전은 다른 호수와 인공 호수에서 행해졌으며 콜로세움과 키르쿠스 대경기장에 물을 채워넣고 개최하기도 했다. 이 경기는 로마인의 군국적인 전통과 승리의 영광을 재현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오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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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입니다. 괄호를 내용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포인트 한 장이 약 1만 자, 5천 토큰입니다. 어느 AI 창에도 그냥 들어갑니다. 잘라 붙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있습니다. 포인트 01·02 본문 45건을 사료와 대조해 심각한 오류 6건을 찾았습니다. 전투 승패가 뒤집힌 서술이 두 장에 하나꼴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기준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