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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적과의 전쟁
카이사르는 어떻게 갈리아를 정복했는가30포인트 편역본
범상치 않은 남자, 카이사르의 등장
카틸리나 사건 당시 폼페이우스는 오리엔트 원정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때 민중파 내에서는 폼페이우스를 다시 집정관 자리에 앉히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가진 부와 행운을 질시한 원로원의 보수파 귀족 중에 그를 추천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거듭 이의를 제기한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군사호민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그가 세 번에 걸쳐 원로원의 결의에 홀로 반대하며 원로원의 권위를 떨어뜨리자 결국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추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엄청난 수의 군중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킬 태세로 원로원으로 몰려들어 항의했다.
카이사르는 온화한 어조로 군중들을 설득시키고 집으로 돌려보냄으로써 이 소란을 진정시켰다. 이 사건으로 원로원은 처음으로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의 면직 결정을 취소했다.
이때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나이는 스물일곱 살이었다. 가난한 귀족 출신이기는 했지만 카이사르의 가계는 기원전 7세기 후반에 제4대 왕이 된 안쿠스 마르키우스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그 이후의 긴 역사 속에서 법무관, 재무관, 집정관을 지낸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 모두는 범용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카이사르는 천재 특유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는 두통을 앓고 있었으며 간질에 의한 발작도 종종 일으켰다. 또 약간 대머리였는데 그 사실을 몹시 창피하게 여겼으며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작가 지망생이었다고 한다. 중간 키에 깡마른 체구였던 그는 오랜 군인 생활을 거치면서 탄탄한 몸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말술에 능했으며 뒷짐 지고 빨리 달리기를 잘 했다고 한다. 전진 중에는 병사들의 선두에 서서 걸었고 전차 안에서 새우잠을 잤으며 조식에도 만족했다. 또 두뇌가 매우 뛰어났으며 결코 미남은 아니었지만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아 관계를 맺은 여자들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가 전투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오면 부하들은 "시민들이여, 아내를 감춰라! 대머리 난봉꾼이 돌아왔다네!"이라고 외치면서 다녔다고 한다. 그때마다 제일 먼저 웃음을 터트린 것은 바로 카이사르였다.
카이사르가 귀족 부인들을 유혹하는 바람에 원로원의 모든 의원들로부터 미움을 샀다고 하는데 사실은 여성들이 먼저 유혹했던 것 같다. 부와 명예, 심지어 용모까지 갖추어 남부러울 것 없던 폼페이우스조차 그에게 아내를 빼앗겨 이혼할 처지가 되기도 했다. 이때 카이사르는 자신의 여동생을 폼페이우스에게 시집 보내는 것으로 사죄했다.
한편 카이사르는 동성애자이기도 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는 열여섯 살에 학업을 마치고 젊은 무사로서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원정에 참가했는데 용감하게 싸우기는커녕 미소년에게 빠져 있던 비티니아(아나톨리아 북서부)의 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아 곁에서 그를 모시기도 했다.
열여덟 살에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명령으로 결혼을 했지만 아버지가 죽자 곧바로 아내와 이혼하고 고모부인 마리우스의 조카이자 후계자였던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재혼했다. 술라가 카이사르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은 이 시기였다. 술라는 카이사르가 코르넬리아와 이혼하면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카이사르는 '사랑'을 위해 명령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사형을 선고받고 아내의 지참금도 몰수당했으나 많은 친구들의 중재로 추방에 그쳤다.
술라가 은퇴한 후에 카이사르는 일단 로마로 돌아갔지만 마리우스의 일족으로 몰려 온갖 핍박을 받던 중 킬리키아로 떠났다.
로마 왕으로 향한 첫걸음
킬리키아로 떠난 지 9년 후인 기원전 68년에 로마로 귀환한 카이사르는 재무관으로 입후보했다. 이때 그는 집정관이자 대부호인 크라수스의 아내를 유혹하여 그로부터 돈을 빌리는 데 성공하여 에스파냐의 통치권과 통수권을 손에 넣고 그곳으로 부임해 갔다. 그곳에서 그는 반란을 진압하고 군인과 행정관으로서 실적을 올린 후 다시 로마로 돌아왔다.
기원전 65년에는 고위 조영관에 당선되어 대경기장에 25만 명의 관중을 모아놓고 전대미문의 경기를 개최했다. 당시 로마 시의 인구는 약 백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로마 시민의 4분의 1이 몰려와 이 전통적인 '구경거리'에 도취되었다.
이때 카이사르는 최고신 유피테르(주피터, 제우스)의 신전에서 대경기장으로 향하는 행진을 비롯하여 전차 경기, 기마 경기, 체육 경기, 연극, 음악과 무용, 그리고 검투사 320조의 검투 시합, 야수 사냥, 거기에 덧붙여 호화스러운 향연을 개최했기 때문에 모든 시민들이 그를 로마의 지배자로 인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수령 자리도 확보해 놓았다.
3년 후에는 에스파냐 속주의 총독으로 취임했으나, 그가 거액의 빚을 떠안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채권자들이 정부로 몰려와서 채무를 모두 정산할 때까지는 카이사르를 임지로 가지 못하도록 요구했다. 이때 다시 크라수스가 원조하여 2500만 세스테르티우스의 빚을 청산해 주었다.
또다시 에스파냐로 간 카이사르는 거의 완벽하게 반란을 평정하고 거액의 전리품을 가지고 로마로 돌아와 크라수스에게 진 빚을 모두 갚았다. 이것이 앞에서 언급한 '1년 내 빚을 탕감'한 일화이다.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부르주아인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손을 잡았는데, 이것이 세 사람에 의한 제1차 삼두정치의 시작이었다.
정계에서 이 세 우두머리(패트런patron, 후원자)가 부하 정치가들을 '비호'하는 관계가 확립된 것이다. 기원전 60년에 시작된 이 방식은 놀랍게도 지금까지 이탈리아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특히 시칠리아 출신의 갱 조직인 마피아는 이 전통을 지금도 고수하고 있다고 한다.
카이사르도 물론 이 방식을 택했다. 먼저 자신의 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의 아내로 보내 인척 관계를 맺었다. 카이사르는 임기를 마치자 세 번째 아내인 폼페이아와 이혼했다. 그녀가 카이사르에게 심취해 있던 청년 귀족 클로디우스와 간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간통죄 재판에서 승인으로 나서 두 사람의 무죄를 주장했다.
키케로가 반대 심문에서 "그러면 왜 이혼을 했는가?"라고 문자 "나의 아내는 어떤 의심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배심원을 매수하여 클로디우스를 방면해 주었다.
마지막으로 특기할 만한 것은 바로 카이사르다운 '발명'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는 원로원이 매일 개최하는 회의의 내용을 모두 기록하고 그 내용을 매일 공표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세계 최초의 신문인 '일보'가 탄생했는데, 당시 '일보'는 벽보였기 때문에 전 로마 시민들이 무료로 읽을 수가 있었다. 이 일로 인해 그동안 자신들만이 누려왔던 권력을 빼앗기고 만 원로원들은 결국 카이사르에게 굴복했다.
이러한 '비호' 관계를 카이사르가 의도적으로 실행한 것은 사실상 자신이 '로마 왕'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집정관 자리를 내놓기 전에 카이사르는 자신을 임기 5년의 갈리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해 놓았다. 게르만인과 헬베티족(스위스)이 갈리아(지금의 서유럽)를 침략해 왔기 때문에 이들을 평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상의 이유였다. 아펜니노 산맥 바로 코앞에 군을 주둔시키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산맥 건너편(엄밀히 말하면 루비콘 강 건너편)에 제대로 갖춰진 군단을 배치하고 그 모든 지휘권을 쥐면 사실상 이탈리아 반도 전역과 갈리아 속주, 에스파냐 속주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웅대한 계획의 시작이었다.
갈리아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이러한 지역적 상황을 즉시 파악했다. 북쪽에는 제대로 된 민족이나 국가라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산재해 있는 켈트(지금의 독일) 부족들이 서로 끊임없이 다투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그들은 세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카이사르는 자신이 저술한 '갈리아 전기'에서 기록하고 있다.
제1계급은 귀족·기사로 군사력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제2계급은 신관해업으로 종교와 교육을 장악했고(드루이드), 제3계급은 민중으로서 그들은 오직 기아와 공포만을 벗하며 살고 있었다.
그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세 계급을 분열시켜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사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면 되었다. 어느 기사든지 그 밑에 소수이나마 따르는 민중이 있게 마련이므로 민중은 그냥 내버려두어도 되었다.
다만 한 가지는 신관들이 결속하여 일종의 '민족통일'을 달성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신관들을 로마 편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카이사르의 이러한 지적은 실로 날카로운 것이었다. 후에 기독교에 의해 결속이 강화된 이 지역의 왕들이 전쟁을 하면서도 결국은 '유럽'이라는 고도의 통일문명권을 이루어낸 것을 보면 그의 통찰이 정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카이사르에게는 갈리아를 정복하는 데 필요한 병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이 광활한 신천지를 복속시키기 위해 로마 정권으로부터 의탁받은 것은 약 3만 명으로 구성된 4개 군단이 전부였다. 때마침 게르마니아인 15만 명이 라인 강을 따라 플랑드르로 침입했고 남쪽의 산악지대로부터 헬베티족 40만 명이 남프랑스로 눈사태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갈리아 전역은 공포에 떨면서 카이사르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그는 원로원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자비로 4개 군단을 창설했다. 그리하여 일단 적에게 화의를 요청했지만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가차없이 게르마니아와 헬베티아 양군과 전쟁을 시작했다.
카이사르는 두 번의 격렬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압도적인 숫자로 대항했으나 참패한 헬베티아 군은 귀향을 요구했다. 카이사르는 '이후에는 로마에 대해 복종을 맹세한다'는 조건으로 허락해 주었다. 또 게르마니아인은 거의 전멸했으며 가까스로 패주해 도망간 대장도 곧 사망하고 말았다.
갈리아 정복과 정계로부터의 추방
갈리아 전역을 망연자실하게 만든 이 전투의 대승으로 인해 무장 카이사르의 명성은 온 천하에 널리 퍼졌다. 그는 '앞으로는 이런 침략이 일어나지 않도록 갈리아 전 부족은 카이사르의 지휘 아래 통일'하도록 일렀다. 그러나 많은 부족들이 그의 명령에 반항하며 벨가이(지금의 벨기에)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카이사르는 먼저 원군인 벨가이인을 격파한 후에 그들에게 원조를 요청한 갈리아의 여러 부족들도 공격했다. 그리고 서둘러 로마에 상황을 보고하자 로마 시민들은 열광하고 민회는 갈채를 보냈으나 원로원은 못마땅해했다. 그리고 보수파는 책동을 시작했다.
그 사실을 눈치 챈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루카 시에 불러 삼두정치의 강화를 모색했다.
당시 보수파 귀족의 대표는 위대한 감찰관이었던 카토(대 카토)의 자손 카토(소 카토)였다. 솔직하고 호쾌했으며 한편으로 엄격했던 대 카토에 비해 소 카토는 정직하지도 않았고 성미가 까다로웠으며 늘 도덕군자처럼 행동하여 호민관 이상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출발한 후에 로마의 지배자가 된 것은 그 유명한 클로디우스였다. 그는 우선 카토를 키프로스 속주의 장관으로 파견하는 안을 민회에 제출하여 그를 로마에서 쫓아내 버렸다. 그로써 보수파는 수령을 잃고 말았다.
다음으로 클로디우스는 마음속 깊이 증오하고 있던 키케로를 박해하여 그리스로 추방했으며 그의 호화로운 저택을 파괴하고 재산까지 몰수했다.
키케로는 그 권위가 예전만큼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국제 문제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그의 이러한 폭거를 책망했다. 그러나 클로디우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두 사람의 유력한 방패막에 반기를 들어 사병을 소집하고 공포 정치를 행하려 들었다. 이 테러 단체에 의해 기습을 당한 키케로의 동생도 형의 소환을 호소했고 민회도 이를 승인했다.
폼페이우스는 가난한 귀족 밀로로 하여금 폭려단체를 조직하게 하여 클로디우스에게 대항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로마 시내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대환영을 받으며 돌아온 키케로는 원로원에서 삼두정치의 정당성에 대해 연설하면서 갈리아 작전에 대한 국고 부담을 이유로 들어 폼페이우스에게 6년 동안 이탈리아 전 토지에 대해 전권을 맡기도록 만들었다.
한편 꽤 많은 업적을 올리고 키프로스에서 귀임한 카토의 지휘 아래 보수파는 반삼두정치 투쟁을 재개했다.
카이사르가 소집하여 루카 시에서 이루어진 삼두정사 회담은 이러한 로마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로마 전군의 지휘권을 세 명이 독점하는 데 합의했다.
갈리아 총독 카이사르는 이러한 조치를 취한 뒤 다시 임지로 급히 떠났다. 그는 기원전 56년에 대서양 연안 지방을 정복하고 다음해에는 게르마니아의 새로운 침입을 물리친 후 도버 해협을 건너 로마인으로서는 최초로 브리타니아(지금의 잉글랜드) 땅을 밟았다.
그 당시에는 특별히 적대시하는 부족이 없었기 때문에 며칠간 체류하면서 새로운 땅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기원전 53년에는 대군을 이끌고 다시 정벌하여 템스 강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이때 갈리아에서 반란이 촉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지 원정을 단념하고 속주로 되돌아왔다.
처음에는 종종 발생하는 치안문제라고 가볍게 여긴 카이사르였지만 갈리아가 처음으로 하나가 되어 전면적인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을 이끄는 사람은 '갈리아의 왕'이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던 산악지대의 기사 베르킹게토릭스로 카이사르와는 면식이 있었다. 대병력을 보유한 그는 탄탄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군대의 선두에 서서 알프스를 넘어 군기까지도 걸지 않은 채 비밀스럽게 불철주야 행군을 계속하여 적의 본거지를 향해 나아갔다.
카이사르는 얼마 되지 않은 기병대를 이끌고 적진을 돌파하여 로마 군 주력부대와 합류하여 적을 격파했다. 그런데 카이사르의 군대는 그때까지 가장 신뢰하고 있던 동맹부족 아이두이족에게 포위되어 뼈아픈 패배를 맛보았다. 게다가 열 배나 더 많은 적들 속에서 고립되어 전사를 각오해야만 했다.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나온 카이사르는 베르킹게토릭스가 숨어 있던 쥐라 산맥 내의 알레시아(지금의 알리즈생트렌)를 포위했으나 갈리아의 여러 부족들이 수령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바람에 갈리아 군은 25만 명에 이르렀다.
카이사르의 군대는 부족한 무기와 식량에 의지하여 공방을 계속했는데, 일주일이 되어 식량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쯤 갈리아 군에 내분이 일어나 분열되었고 병사들은 패주하기 시작했다.
후에 카이사르는 "하루만 늦었어도 이쪽이 전멸할 뻔했다"라고 회고했다.
베르킹게토릭스는 알레시아에서 홀로 나와 항복했다. 카이사르는 시를 파괴하지 않고 반란 병사 전원을 노예로 판 돈 전액을 로마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카이사르는 2년간의 전투 끝에 갈리아를 정복했다. 이 새로운 영토는 인구 500만, 면적은 이탈리아 반도의 두 배였다. 후에 이곳으로부터 로마의 언어와 문명이 유럽 전 지역으로, 아니 전 세계로 퍼져 나갔는데, 이때 내분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던 로마는 갈리아 속주 총독 카이사르가 얼마만큼의 위업을 이루어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게다가 카이사르를 이탈리아 반도에서 추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집정관 임기를 마친 크라수스는 시리아를 통치하기 위해 출발하여 파르티아인을 공격했지만 참패했고, 나아가 한창 화의가 진행되는 도중에 적장에게 칼을 맞아 목이 잘려나갔다.
한편 폼페이우스는 에스파냐로 출발하지 않고 강력한 군단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알 수 없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폼페이우스와 정략결혼을 한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가 죽자 카이사르는 질녀 옥타비아와의 재혼을 권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이를 거절했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아내 칼푸르니아와 결별하고 폼페이우스의 딸과 결혼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해보았지만 이 또한 거절했다. 폼페이우스는 결국 카이사르와 인연을 끊고 보수파의 수장으로 전향했다. 즉, 삼두정치가 붕괴된 것이다.
기원전 52년에 밀로는 클로디우스를 살해했고, 밀로 자신도 유죄를 언도받아 마살리아(지금의 마르세유)로 도망쳤다. 원로원은 폼페이우스를 단독 집정관으로 취임시켰다. 키케로는 이를 두고 '동료 없는 집정'이라고 불렀는데 사실은 독재관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총독 임기가 기원전 49년에 끝난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임기를 기원전 46년까지 연장해서 전군을 장악하려고 했다. 카토는 카이사르를 재판에 회부하여 이탈리아 땅에서 추방하라고 주장했다. 민중파의 대표인 호민관도 거부권을 발동했다.
이리하여 갈리아 정복이라는 대사업을 이룩한 카이사르는 전 로마 정계로부터 거부당하게 되었다.
등장 객체
- 인물 — 가비니우스, 가이우스 마리우스, 기번, 대 카토, 마리우스, 밀로, 베르킹게토릭스, 소 카토, 술라, 안쿠스 마르키우스, 옥타비아,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 카이사르, 카틸리나, 칼푸르니아, 코르넬리아, 크라수스, 클로디우스, 키케로, 킨나, 폼페이우스, 피소
- 지명 — 갈리아, 갈리아 속주, 그리스, 독일, 라인 강, 로마, 루비콘 강, 루카, 브리타니아, 소아시아, 시리아, 시칠리아, 아펜니노 산맥, 알레시아, 알프스, 에스파냐, 오리엔트, 유럽, 이탈리아, 이탈리아 반도, 키프로스, 킬리키아, 터키
- 사건 — 갈리아 정복, 검투 시합, 알레시아 포위전, 연극, 제1차 삼두정치, 카틸리나 사건
- 집단 — 검투사, 게르마니아인, 그리스, 기독교, 드루이드, 로마 군, 로마 시민, 민중파, 아이두이족, 원로원, 켈트족, 헬베티족
- 제도 — 기독교
이 포인트의 관계망
이 대목에 나온 관계 21건입니다. 점을 끌어 옮기고 휠로 확대할 수 있습니다.관계가 달린 것만 그립니다. 이름만 나온 인물·지명은 아래 목록에 있습니다. 얽힌 갈래가 많은 18개만 그렸고 3개는 아래 목록에만 있습니다.자주 묻는 것
다른 책입니다. 30포인트 편역본은 한국어 편역이고 원전은 기번의 영문입니다. 섞어 인용하면 사실관계가 어긋납니다. 인물·관계 자료는 편역본 계통에서만 뽑았습니다.
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입니다. 괄호를 내용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포인트 한 장이 약 1만 자, 5천 토큰입니다. 어느 AI 창에도 그냥 들어갑니다. 잘라 붙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있습니다. 포인트 01·02 본문 45건을 사료와 대조해 심각한 오류 6건을 찾았습니다. 전투 승패가 뒤집힌 서술이 두 장에 하나꼴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기준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