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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뒤흔든 여왕의 야심
클레오파트라는 왜 안토니우스와 결합했는가30포인트 편역본
로마 시민은 브루투스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를 존경했으며 그로부터 다시 100년이 지난 후에 즉위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그를 로마 정신의 거울이라고 칭송했다.
— 기번
안토니우스 연합군과 원로원의 대결
카이사르를 잃은 후 클레오파트라에게서는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게다가 이 모든 원인이 클레오파트라에게 있다고 단정 지은 로마 시민들은 "이방의 여자를 타도하라! 나일의 뱀을 죽여라!"라고 외치며 그녀의 별장으로 몰려들었다.
자신과 함께할 무리들을 모은 클레오파트라는 짐을 챙길 겨를도 없이 비상문을 통해 탈출하여 테베레 강가에서 작은 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하구에서 갤리선으로 갈아타고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쳐 왔다.
한편 카이사르의 유언으로 후계자에 지명된 옥타비아누스는 열여덟 살밖에 안 된 나이에 일리리아(구 유고슬라비아·아드리아해 연안 지역)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는 카이사르의 여동생 율리아의 손자였다. 대를 이을 자식이 없었던 카이사르는 어릴 적부터 스파르타 교육을 받으며 면학에 힘써온 이 소년을 양자로 맞아들여 애정을 쏟았다.
카이사르는 에스파냐 원정 때 자신을 수행하게 하여 소년의 강한 의지를 지켜보고 감동할 정도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어린 시절부터 장이 약해서 항상 습진과 기관지염으로 고생했다. 나이가 들수록 중상은 더욱 악화되어 전장에서도 방한구와 약 다발을 손에서 놓지 못했고 언제나 새처럼 소식했다. 그러나 정작 전쟁에 돌입하면 무척 면밀하게 이해관계를 계산하고 적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천재적인 영감을 가지고 한순간의 번득임으로 시종일관 대담한 승부를 거듭한 카이사르는 자신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옥타비아누스를 마음에 들어했다. 그리하여 옥타비아누스가 열일곱 살이 되자 곧바로 일리리아의 관직에 취임시켜 군대의 지휘와 정치를 실습하도록 했다.
카이사르의 암살 소식과 함께 자신이 후계자로 지목되었다는 말을 듣고 옥타비아누스는 서둘러 로마로 달려와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그때 38세의 안토니우스는 스무 살의 나이 차이를 과시하면서 그를 어린 '철부지'로 여기며 얕보았다.
옥타비아누스는 "대백부의 유언인 1억 세스테르티우스를 시민과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는 건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으나 안토니우스는 "빨리 어떻게든 처리해야겠지"라며 애매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때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친구였던 부호들에게 자금을 빌려 시민들에게 분배했다. 고참 병사들은 그의 신선한 일 처리 방법을 보고 감격하여 이 어린 '철부지'에게 호의를 품기 시작했다.
오히려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은 안토니우스였다. 그는 며칠 후 옥타비아누스가 보낸 자객에게 습격당했다고 공언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일리리아에서 2개 군단을 불러들이고 원로원의 정·부양 집정관이 이끄는 군대와 합세하여 안토니우스를 공격했다.
카이사르가 죽은 이후 귀족 계급은 안토니우스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권력을 손에 거머쥐자마자 곧바로 1억 2천만 세스테르티우스의 국비를 착복했다. 게다가 스스로를 '갈리아키살피나 총독'이라고 칭하면서 이탈리아 반도 전 군단의 통수권을 장악하려 했다. 그대로 놔두었다간 틀림없이 카이사르보다 훨씬 더 잔혹한 독재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기원전 43년에 드디어 양군은 격돌했다. 그때 원로원의 정·부 집정관은 전사했고, 안토니우스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투에 패하고 도주했다. 승리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귀환하여 집정관으로 입후보하고 카이사르의 암살범을 처형하도록 원로원에 촉구했다. 그러나 이 청년을 교묘하게 조종하려 했던 원로원은 이를 거절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죽은 카이사르의 심복인 레피두스를 내세워 안토니우스와 강화를 맺었다. 그리하여 이 세 사람에 의한 '제2차 삼두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세 사람은 마침내 군대를 앞세워 대복수전을 감행했다. 원로원 의원 200명, 관리 2천 명이 카이사르 암살죄로 전 재산을 몰수당한 뒤 처형되었다. 도망자에게는 8만 세스테르티우스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키케로는 도주를 기도하다가 체포되어 목과 오른손이 잘린 채 세 거물 앞으로 보내졌다.
주범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마케도니아와 시리아 양 속주의 병사를 합쳐서 공화제 로마 최후의 군단을 형성하고 팔레스티나(지금의 팔레스타인), 킬리키아(지금의 터키 중남부), 트라키아(지금의 불가리아 동부)의 여러 주를 제압했다.
결국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 연합군이 진격하여 그들과 결전을 치르게 되었다. 브루투스는 옥타비아누스 군을 시종 압도했으나 카시우스 군은 전멸하고 대장은 자결했다.
자군의 파멸을 지켜보던 브루투스는 친구의 칼집에서 빼어든 시퍼런 칼날에 몸을 맡겨 자결했다. 안토니우스는 브루투스의 시신을 발견하자 최고 지위를 상징하는 자의를 벗어 옛 전우를 덮어주었다고 한다.
이집트 부흥을 위한 도구
카이사르의 복수전을 마치고 나서 세 거물들은 속주를 분할 통치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갈리아·게르마니아·에스파냐(지금의 유럽)를.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안토니우스는 이집트·그리스·중동(아시아)의 여러 주를 분할받았다.
레피두스는 이 분할에 만족했지만 다른 두 사람은 언젠가는 상대를 쓰러뜨리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특히 안토니우스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대병력을 이끌고 동방 제국을 순시했다. 그리고 본영을 킬리키아의 수도 타르수스에 설치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사자를 보냈다. 사자는 카이사르 암살 직후 반란을 일으킨 수장 카시우스에게 자금을 지원한 책임을 물어 타르수스에서 재판을 받으라는 내용을 전달했다.
안토니우스는 광장 중앙에 웅장한 대좌를 설치하고 클레오파트라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타르수스의 시민들도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이집트 선단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안토니우스는 광장에 설치된 공개 법정 자리에 앉았다. 시민들도 모두 이동했다. 배가 도착하면 클레오파트라가 즉시 나타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신님의 배가 도착한다!"라고 소리 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시민들이 일제히 그녀를 마중하러 항구로 달려가는 바람에 광장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배는 초라한 갤리선이 아니었다. 이집트 왕가의 배는 저녁놀에 빛나는 강 수면을 미끄러지듯이 달려왔다. 빨간 돛을 달고 뱃머리에는 금박을, 배의 꼬리 부분에는 은박을 붙이고 뱃사공들이 일제히 은색의 노를 저으며 다가왔다. 배 끝쪽 좌우에는 조타수 두 사람이 서있었고 물의 요정처럼 차려 입은 시녀들이 무리 지어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중앙에 금으로 만든 덮개 아래에 아름다운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의 모습으로 꾸민 여왕이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여왕 주변의 시녀들도 모두 여신 의상을 입고 있었다. 하프와 피리의 합주가 울려 퍼지고 여왕의 옥좌 앞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기로운 연기는 시내로 퍼져나갔다.
상상을 초월하는 환상적인 배의 출현으로 임시 법정의 기록 담당, 서기, 배심원 모두가 항구로 달려가는 바람에 안토니우스 혼자만이 광장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그런 안토니우스에게 클레오파트라의 초대장이 전달되었다. 그리하여 재판하는 자와 재판받는 자의 입장이 바뀌고 말았다.
이때만 해도 안토니우스는 아직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는 스무 살의 아가씨였고, 5년 전 로마에서 카이사르가 에스파냐 정벌을 위해 떠나면서 그녀를 보호하도록 요청했을 때도 부하에게 안전을 배려하도록 명령하고는 안토니우스 자신은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그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날 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왕실의 배에 승선하여 클레오파트라를 처음 보고는 그 요염함에 황홀할 지경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식사를 하기 전에 술로 건배하면서 재판에 대해 얘기를 꺼내기는 했다. 그러나 식사를 마치고 과일을 먹을 때는 페니키아와 키프로스 섬을 그녀에게 준다는 이야기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전에 이미 광활한 아라비아 반도는 그녀에게 진상하기로 되어 있었고 부하 장관 모두가 그녀에게 빠져 그녀의 요구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거액의 권리를 창출하는 동방 영토에 대한 답례로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와 하룻밤을 보내고 장관들도 요정과 같은 모습으로 꾸민 시녀들과 밤을 보냈다.
안토니우스는 로마에서의 권력 제패를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떠나고 말았다.
물론 클레오파트라가 무지하고 강건한 몸의 소유자이자 얼굴에는 기름기가 번질거리는 거칠고 난폭한 이 남자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로마의 삼두정치가 언제까지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므로 안토니우스를 이집트 부흥을 위한 도구로써 이용한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전성기
그 즈음 로마의 옥타비아누스는 일찍이 카이사르가 그랬던 것처럼 이탈리아의 모든 영토를 재통일하기 위해 고투하고 있었다. 에스파냐에서 거듭 세력을 만회한 폼페이우스파가 식량 공급을 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서는 실업과 인플레가 확산되었고 그 일을 빌미로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반기를 들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때가 바로 로마 멸망의 호기라고 판단하여 안토니우스에게 군을 일으키도록 설득했다. 클레오파트라의 제의에 귀가 솔깃해진 안토니우스는 선단을 편성하여 이탈리아 반도 공격에 나섰다. 반도에 상륙한 안토니우스 군대는 옥타비아누스 군을 포위했으나 양군 병사들은 동족 간의 전투에 반대하여 화평을 강력하게 호소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화의하고 그 증거로 연대를 하도록 했으며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선한 여성이었던 옥타비아는 이 흉포한 남자의 마음을 교화시키기 위해 함께 아테네까지 가서 미술관이나 철학 강연회 등을 순례하며 그가 교양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회화나 조각은 보는 척만 하고, 심오한 강의는 들은 척만 할 뿐 교양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의 마음속을 채우고 있었던 것은 오직 클레오파트라와 전쟁뿐이었다. 결국 그는 옥타비아를 로마로 보내고 자신은 반항 태세를 취하는 아르메니아의 헤르시아 왕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다.
클레오파트라는 이 출정에 반대하여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의 안티오키아까지 가서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그가 500킬로미터나 추격해서 얻은 것은 명목상의 복종뿐이었다. 그런데도 알렉산드리아에서 자기 멋대로 개선식을 거행하여 안토니우스의 평판은 한층 더 나빠졌다.
중동의 속주를 쉽게 무너뜨리고 자신감에 찬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에게 이혼장을 보내고 클레오파트라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이집트의 왕위 계승자로 지목하고 자신과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에게 중동 속주를 넘겨주었다. 클레오파트라 또한 중동을 얻게 되었다.
이리하여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두 영웅은 최종적으로 결별을 맞았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도 성가신 연애 소동에 휘말렸다. 상대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로서 그녀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5개월이 된 상태였다. 아직 서른 전이었던 옥타비아누스에게는 두 번째 아내 스크리보니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율리아가 있었다.
클라우디우스 네로를 조용히 설득해서 이혼하게 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도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리비아와 결혼했다. 그러고는 네로와 리비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티베리우스와 아직 엄마의 태중에 있는 드루수스를 양자로 삼았다. 티베리우스는 후에 제2대 황제가 되는데 옥타비아누스와 전처 스크리보니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 율리아가 그의 아내가 된다.
기원전 32년 봄에 안토니우스는 원로원에 편지를 보내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그리고 자신 세 사람이 권력과 무기를 포기하고 물러나면서 그 대신 공화제로 복귀하자는 제안을 했다. 적어도 이것은 중동을 얻은 이집트의 안녕을 확신한 클레오파트라의 획책이었을 것이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베누스 신전에 보관되어 있던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가지고 나와 모든 시민들 앞에서 공개했다. 이것이 진짜 유언장이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거기에 씌어 있었던 것은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만을 상속인으로 인정하고 그 어머니를 후견인으로 정한다는 내용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이에 격노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러한 시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이집트의 여왕'인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 포고를 했다.
기원전 31년 9월 2일에 양군은 이오니아해에서 격돌하여 장렬한 해전을 벌였다(악티움 해전). 안토니우스의 군단 5열조 군선 500척의 군세에 비해 옥타비아누스는 군단 3열조 군선 250척으로 절반 이하의 전력이었지만 여러 해에 걸쳐 육해 정예군을 키워온 마르쿠스 아그리파의 지휘로 적의 함대를 농락했다. 안토니우스 군은 뿔뿔이 흩어져 알렉산드리아까지 패주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끝까지 추격하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를 이집트에 유폐시켜놓으면 결국 클레오파트라와 갈등을 일으켜 몸과 마음이 소진될 대로 소진되어버릴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이다.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공격의 화살을 돌려 아테네 근처에 상륙하여 그리스를 제압하고 이탈리아 반도로 돌아와서 반란군을 진압했다. 이어서 소아시아와 시리아를 공략해서 안토니우스의 동맹군을 전멸시키고 나아가 알렉산드리아로 침공해 들어갔다.
그전에 안토니우스로부터 강화를 원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가 항복 문서를 보내오자 "그 남자를 죽이면 이집트 여왕의 지위를 보장해 주겠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기원전 30년 8월 1일에 옥타비아누스 군은 알렉산드리아의 성문을 공격했다. 안토니우스 군은 잘 싸우기는 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추격을 당하게 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막료들은 항복했고 '여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안토니우스는 단검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그러나 거의 죽어가던 그에게 클레오파트라가 살아 있다는 전령이 도착했다. 시녀의 부축을 받아 탑 위로 올라간 그는 클레오파트라와 대면한 후 숨을 거두었다.
여왕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시신을 매장하게 해달라는 것과 함께 회견을 요청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알몸에 향수를 뿌리고 백분을 바른 후 그 위에 얇은 천만을 두르고 옥타비아누스 앞에 나타났다. 일찍이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매료시킨 절세의 가인이었지만 그 싱그럽고 아름다운 피부도 눈부신 미소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남자 옥타비아누스가 아니던가.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로마로 연행해 가서 개선하는 전차에 싣고 전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하겠다고 차갑게 말했다.
이 순간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여왕으로서의 존엄과 여자로서의 자존심을 모두 잃어버렸다고 느꼈다.
여왕은 안토니우스의 묘에 참배한 후 영묘 바닥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바구니에서 독사를 꺼내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독사에게 물려 이내 영면에 들었다.
다음날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시신을 안토니우스의 묘 옆에 묻고 카이사리온(프톨레마이오스 15세)을 처형한 뒤 두 딸의 양육을 누이 옥타비아에게 맡겼다. 이리하여 이집트 왕국은 종말을 고했다.
등장 객체
- 인물 — 기번, 드루수스, 레피두스, 리비아 드루실라, 마르쿠스 아그리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브루투스, 스크리보니아,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 율리아 (아우구스투스의 딸), 카시우스, 카이사르, 카이사리온, 클레오파트라 7세, 키케로, 티베리우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프톨레마이오스, 헤르시아
- 지명 — 갈리아, 갈리아키살피나, 게르마니아, 그리스, 로마, 베누스 신전, 소아시아, 시리아, 아드리아해, 아라비아, 아르메니아, 아시아, 아테네, 아프리카,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에스파냐, 유다, 유럽, 이오니아해, 이집트, 이탈리아, 이탈리아 반도, 일리리아, 중동, 키프로스, 킬리키아, 타르수스, 터키, 테베레 강, 트라키아, 팔레스티나, 페니키아
- 사건 — 악티움 해전
- 집단 — 그리스, 로마 시민, 원로원
이 포인트의 관계망
이 대목에 나온 관계 26건입니다. 점을 끌어 옮기고 휠로 확대할 수 있습니다.관계가 달린 것만 그립니다. 이름만 나온 인물·지명은 아래 목록에 있습니다.자주 묻는 것
다른 책입니다. 30포인트 편역본은 한국어 편역이고 원전은 기번의 영문입니다. 섞어 인용하면 사실관계가 어긋납니다. 인물·관계 자료는 편역본 계통에서만 뽑았습니다.
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입니다. 괄호를 내용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포인트 한 장이 약 1만 자, 5천 토큰입니다. 어느 AI 창에도 그냥 들어갑니다. 잘라 붙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있습니다. 포인트 01·02 본문 45건을 사료와 대조해 심각한 오류 6건을 찾았습니다. 전투 승패가 뒤집힌 서술이 두 장에 하나꼴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기준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