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 22
두 번 다시 통합되지 못한 제국의 행방
30포인트 편역본
후계자를 지명하지 못하고 떠난 율리아누스
율리아누스(361~363 재위) 황제는 기독교인 사이에서는 평판이 나빴지만 명군이 될 만한 자질과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단지 시간이었다. 2년도 채우지 못한 재위 기간은 그에게 너무 짧았다.
율리아누스 황제는 363년에 6만 5천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로마의 오랜 숙원이었던 페르시아 정벌에 나섰다. 예상대로 전쟁의 치열함은 극에 달했다.
율리아누스 황제는 자국의 군대를 진두지휘하며 병사들을 고무시켰다. 전쟁터에서는 적과 아군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의 난전이 벌어졌다.
"위험해!" 근위병이 소리치는 순간, 매주하기 시작한 적의 부대로부터 창과 화살 세례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고 그중 한 개가 황제의 팔을 관통하여 복부에 꽂혔다. 근위병이 뛰어와서 황제를 조용히 안아 일으켜 가까운 병사로 끌고 갔지만 화살촉은 간장을 꿰뚫고 있었고 마침내 황제는 숨을 거두었다.
이때만 해도 로마의 군세가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죽음은 병사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병사들은 평정심을 잃고 전의를 상실한 끝에 결국은 페르시아 군의 기세에 눌려 포위되고 말았다.
혼란에 빠진 로마 군에게는 지휘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율리아누스 황제는 후계자를 지명해 두지 않았었다. 게다가 천애의 고아였던 그는 후계자로 삼을 만한 적당한 친족도 없었다.
사방이 페르시아 군에 의해 포위된 로마 군 진영의 상층부는 급한 대로 역전의 사령관 요비아누스(363~364 재위)를 황제로 추대했다. 보급로를 차단당한 채 적에게 포위된 요비아누스 황제는 샤푸르(2세) 왕이 제시한 굴욕적인 화의를 받아들여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요비아누스 황제도 로마로 돌아가는 도중 급사하고 말았다. 화로에서 나온 일산화탄소에 의한 중독사였다.
요비아누스 황제의 죽음 이후 로마의 제위는 10일간 공석 상태였다. 후계자 선출을 위한 회의가 연일 열렸고 그 결과 만장일치로 황제에 추대된 것은 발렌티니아누스 장군이었다.
그는 키가 크고 말씨나 태도가 우아했으며 날쌔고 용맹스러운 풍모를 갖추고 있어서 아군에게는 경외심을, 적에게는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인물이었다.
재능을 갈고 닦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금욕과 절제된 생활을 추구하는 점을 높이 산 원로원 의원들은 그가 빈사 상태에 놓인 로마 제국을 구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즉위식 때 그는 단상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로마 제국의 안전과 번영이라는 무거운 짐은 나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기에는 벅찬 것이다. 짐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충분히 알고 있다. 따라서 유력한 공치제에 의한 원조를 간절하게 요구하는 바이다."==
즉위식이 있은 지 30일 후에 그는 공치제의 이름을 발표했다. 지명된 사람은 친동생인 발렌스(364~378 재위)였다. 원로원 의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발렌스는 당시 서른여섯 살이었으며 그에게는 아무런 실적도 없었고 성품을 기대할 만한 인물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반대로 인해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제국의 안위뿐만 아니라 황제의 생명조차 위험에 노출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생인 발렌스를 공치제로 임명한 것과 발맞추어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을 동서로 분할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통일한 로마 제국은 이리하여 불과 40년 후에 다시 이분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동서 로마 제국 간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면서 두 번 다시 통일되지 않았다.
깨어진 동로마의 평화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는 도나우 강 하류 지방에서 페르시아 국경에 이르는 동방의 비옥한 영토를 모두 아우에게 맡기고 그 자신은 나머지 지역을 통치했다. 제국이 둘로 나뉘어졌기 때문에 행정관과 장군의 수도 두 배로 중원되었다. 로마 제국의 분할 작업이 무사히 끝나자 두 사람은 서로 포옹한 후 헤어졌다. 그러나 이것이 두 형제가 나눈 마지막 포옹이었다. 두 사람은 그 이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이 각각 봉치한 서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은 그후 어떤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일까.
먼저 발렌스 황제의 동로마 제국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그가 통치하기 시작하자마자 하나의 반란으로 인해 동로마의 평화는 깨어지고 말았다. 반란을 일으킨 것은 프로코피우스 장군이었다.
율리아누스 황제의 먼 친척이었던 프로코피우스 장군은 자신이야말로 율리아누스의 후계자라고 주장했고 또 그를 지지하는 시민도 적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율리아누스 황제를 추모하는 자가 많았던 것이다. 프로코피우스는 이번 반란이 성공하면 거액의 상금을 내겠다고 호언하며 병사들을 모집했고 발렌스 황제가 수도를 떠나 있는 틈을 타서 콘스탄티노플에 황제의 상징인 자의를 걸치고 나타났다. 그리고 불과 몇 시간 만에 콘스탄티노플을 제압했다.
참고로 이때 프로코피우스가 걸치고 있던 자의는 여러 개의 천을 이어 만든 것으로 그의 모습은 마치 희극 배우와 같았다고 전해진다.
카이사레아 시에서 반란 소식을 들은 발렌스 황제가 취한 행동은 당초부터 그의 실력을 의문시했던 원로원 의원들조차 아연실색케 만들었다.
그는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반역자 프로코피우스에게 화평 교섭을 요구했을 뿐 아니라 은밀하게 양위 의향까지 전했다.
다행히 그의 측근들이 계속 의연한 태도를 취했고 게다가 발렌스 황제를 지지하는 고참병들이 프로코피우스 군 병사들을 필사적으로 설득하는 바람에 결국 프로코피우스는 자신의 군대로부터 버림받았다. 그 직후 그는 정규군에게 체포되었고 공개 장소에서 처형되었다.
발렌스 황제는 무사히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이때 그가 행한 공개 처형이 너무 잔혹한 나머지 시민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실로 앞날이 내다보이는 사태였다. 게다가 발렌스 황제는 '박해자'라는 오명까지 얻었다.
발렌스 황제가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에우독수스 주교에게 세례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단 취급을 받는 아리우스파의 주교였기 때문이다. 아리우스파의 주교에게 세례를 받은 점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정통파 기독교인 신하들의 분노를 샀다.
게다가 불행하게도 발렌스 황제는 의지박약으로 남의 말에 좌우되기 쉬운 인물이었다. 황제는 에우독수스 주교의 설교를 그대로 수용하여 점차 정통파를 증오하게 되었으며 정통파 지도자를 추방하거나 투옥하기까지 했다.
그 시기를 전후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성직자 80명이 선상에서 불타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마도 우연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통파 교회 사람들은 황제와 아리우스파 성직자가 모의한 잔인한 범행이라고 소문을 퍼트렸다. (참고로 발렌스 황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아리우스파는 정식으로 이단 판정을 받았다.)
산 너머 산이었다. 그후에도 발렌스 황제는 페르시아의 위협, 고트족의 침입과 같은 문제로 시종 농락당했다. 또한 훈족에게 쫓겨 도움을 청하러 온 고트족에 대해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해 도리어 반란을 초래하고 말았다. 게다가 그는 서로마의 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반란을 일으킨 고트족에게 결전을 시도하는 실수를 범하여 군대의 3분의 2를 잃은 데다 자신의 생명까지 잃고 말았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뒤에서도 언급하는데 발렌티니아누스 황제가 친동생을 공치제로 지명했을 때 원로원 의원이 품은 의구심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피해를 입었는지도 모르겠다.
발렌티니아누스의 양면성
기번도 언급하고 있듯이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는 엄격한 군인이었다. 그러나 그 엄격함과 타고난 분노의 소유자라는 결점이 제국의 최고 위치에 오르는 순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실로 사소한 일, 가령 경솔한 발언이나 우연히 일어난 직무 태만. 그리고 지각을 한 사람조차도 그는 가차없이 처형했다. 서로마의 황제이기도 한 인물의 입에서 두 번째로 나온 말이 "즉각 목을 자르라!" "화형에 처하라!"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곤봉으로 마구 쳐라!"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측근들은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의 분노를 사는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그의 폭정은 그칠 줄 몰랐다. 그렇게 과도하고 잔인한 처벌을 되풀이하는 동안 발렌티니아누스 황제의 마음에서는 '연민'이나 '후회'같은 감정이 조금도 일지 않았다. 그는 고문이나 단말마의 고통을 오히려 즐겼으며 더욱 잔인한 처형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결국 그의 주변에는 잔혹한 사람들만 모이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인 막시미누스는 로마 시의 명문 일가를 살해함으로써 황제로부터 영예를 얻었을 뿐 아니라 갈리아 민정 총독이라는 지위까지 얻었다.
또 그는 자신의 침실에 곰의 우리를 설치하고 인노켄티아('무해하다'는 의미), 미카 아우레아('금박 조각'의 의미)라는 이름의 모질고 사나운 암컷 곰 두 마리를 키웠다. 경미한 죄로 우리 속에 던져진 죄인은 두 마리 곰에게 갈기갈기 찢겨져 잡아 먹히곤 했다. 그는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을 즐겼다.
이러한 야만적인 행태로 보면 폭군 네로도 그 앞에 무릎을 꿇을 정도로 잔혹 무도한 황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한편 그는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그는 무엇보다 시민과 병사들의 복지에 힘썼다. 로마 시내 14개 구에 한 명씩 유명한 의사를 배치하여 무료 진료를 실시했다. 또 황제 자신이 무학의 무인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 청소년의 교육과 학문을 위해 많은 학교를 세웠다.
모든 인간이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경미한 죄인까지 사나운 곰에게 던져 갈기갈기 찢겨져 유혈이 낭자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는 사람과 이러한 복지 정책을 추진한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또 그는 친동생 발렌스 황제의 기량이 부족함을 알고 그에게 항상 조언을 해주면서 동방 제국의 통치를 지속적으로 도왔다.
375년에 발렌티니아누스 황제가 서로마 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하고부터 11년째 되는 날이었다.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온 야만족의 사자를 알현하던 중에 사자의 무례한 태도에 분노한 황제는 그 자리에서 뇌일혈을 일으키고 쓰러졌다. 결국 그는 '울화'라는 적에 허를 찔려 건강을 해쳤던 것이다.==
==그로부터 1세기쯤 후인 476년에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은 형태를 바꾸면서 15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양 제국의 수명 차이는 국경선의 길이와 관련된다. 서방의 황제는 동방에 비해 몇 배나 긴 국경선을 지켜야 했는데, 그만큼 군비가 더 들어감으로써 재정을 압박했다. 게다가 야만족의 침입을 완전히 저지하기란 불가능했다. ==제국의 운명은 황제의 자질이 아니라 국경선의 길이에 좌우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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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책입니다. 30포인트 편역본은 한국어 편역이고 원전은 기번의 영문입니다. 섞어 인용하면 사실관계가 어긋납니다. 인물·관계 자료는 편역본 계통에서만 뽑았습니다.
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입니다. 괄호를 내용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포인트 한 장이 약 1만 자, 5천 토큰입니다. 어느 AI 창에도 그냥 들어갑니다. 잘라 붙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있습니다. 포인트 01·02 본문 45건을 사료와 대조해 심각한 오류 6건을 찾았습니다. 전투 승패가 뒤집힌 서술이 두 장에 하나꼴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기준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