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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포에니 전쟁
천재 전략가 한니발과 카르타고의 운명30포인트 편역본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군한 한니발 군대
한니발은 에스파냐 군단의 총지휘관으로 취임한 지 2년 후에 이베리아 반도의 사군툼(지금의 스페인 사군토)을 포위했다. 한니발의 활약을 몰랐던 로마가 그를 얕보는 바람에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에스파냐인한니발의 군대의 주요 구성원.
로마와 카르타고의 군사적 경계는 에브로 강이었기 때문에 한니발은 이 시점에서 로마의 세력권으로 침입한 것이다. 그는 몇 주 만에 이베리아 반도 북동쪽을 제압하고 피레네 산맥 남단 해안에 있는 론 강 하구에 도착했다.
한편 로마는 해양국 카르타고의 군대가 해안의 진로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탈리아 반도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지중해를 동진하든지 론 강 하구에서 리구리아 해안가의 육로로 진격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그 방향으로 방어진을 친 것이다.
한니발은 로마 군의 예상을 깨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진격해 왔다. 그러나 이때 에스파냐 군대에도 문제가 생겼다.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하려는 한니발의 의도를 알아차린 부하 3천 명이 군 이탈 의사를 표명해 온 것이다. 그러나 한니발은 노하지 않고 이를 허락했으며 동요하고 있던 다른 7천 명에게도 귀향을 허락했다. 결국 한니발은 정예부대만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들어가기 위해 알프스를 넘어야 했다.
로마 군은 매우 훌륭하게 대응했다. 푸블리우스 스키피오는 피사가 위급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돌아갔고 그나이우스 스키피오는 함대를 이끌고 한니발의 동생이 제압하고 있는 이베리아 반도 동부로 향했다. 사실 이것이 매우 효율적인 전략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한니발은 사상 최초로 기병대와 코끼리 부대로 구성된 군단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었다. 그들이 정상에 도착한 것은 기원전 218년 7월 초순(9월이라는 설도 있다)이었다. 그는 눈 쌓인 가운데서 전 군대에게 이틀간의 휴식을 명했다. 이미 추위와 피로, 게릴라 습격, 또 추락사 등으로 병사 수천 명을 잃은 상태였다. 코끼리를 이끌고 알프스를 내려가는 것은 올라가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힘든 일이었다. 목숨을 내걸었던 용사들도 가끔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이 젊은 장군은 아득히 멀리 바라보이는 평야를 가리키며 "바로 저 땅들이 너희들 것이 되리라"라고 말하며 병사들을 격려했다.
코끼리 부대한니발이 이끈 37마리의 코끼리로 구성된 부대.
갈리아인한니발의 군대에 속했던 병사들로 피로로 인해 탈락함.
로마 군의 기마병은 에스파냐 기병대에게도 당해낼 수 없었다. 에스파냐인은 말 한 마리에 두 사람이 타고 전투를 하다가 그중 한 명이 내려서 상대의 기병과 맞서 싸우는 전법을 취했다.
누미디아인은 혼자서 두 마리 말을 부리면서 한 마리 말이 지치면 다른 말로 옮겨 타고 전투를 지속하는 전법을 취했다.
기원전 217년 2월, 로마 군은 진용을 재수립하여 한니발 군과 대결했지만 또다시 패했다. 한니발은 8개월에 걸쳐 로마 제3속주국인 갈리아키살피나 전 지역을 제압했다.
로마 군은 3만의 병사를 이끌고 역습에 나섰다. 대장 플라미니우스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지만 사실 여기에는 한니발의 계략이 숨어 있었다. 작은 싸움을 되풀이하면서 후퇴를 거듭하는 작전으로 적을 교묘하게 유인하여 숨어 있던 기병대가 갑자기 나타나 함성을 지르며 로마 군을 공격해서 전멸시켰다. 로마 군 대장 플라미니우스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칸나이에서 펼쳐진 고대사상 최대의 전투
패전 소식을 들은 로마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원로원은 시민들에게 전장의 상황을 알려주고,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 품으로 임명하여 전 군대의 지휘권을 맡겼다.
한편 한니발에게도 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로마의 식민 도시들이 모두 성문을 폐쇄하고 물이나 식량 보급에 응하지 않은 것이다. 조금은 호의적인 아드리아 해안으로 전진했지만 세 번에 걸쳐 격전을 치른 장병들의 누적된 피로도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호의적이었던 갈리아 부족의 군대는 오랜 전투의 피로로 인해 차츰 탈락하기 시작했다. 카르타고에 원군을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랭한 거절뿐이었다. 더 이상 취할 수단과 방법이 없어진 한니발은 남진을 거듭하면서 로마 군과 싸워야 했다.
로마의 독재관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당당한 무위' 작전을 전개했다. 작은 전투에 참여하면서 가끔씩 기습을 감행하기도 했지만 절대 결전에 휘말리지는 않았다. 적이 기아와 피로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기다리는 철저한 지구전을 펼쳤다.
파비우스의 소모전에 대해 한니발도 지략을 발휘하여 여러 번 기습을 시도했다. 그중 하나가 칼리쿨라 언덕에서 한밤중에 쇠뿔에 횃불을 매달고 로마 군 진지로 공격해 들어가는 놀라운 작전이었다. 유럽에서는 그 이후에도 두세 번 정도 이와 같은 기습 작전이 이용되었던 것 같다.
또 흥미로운 것은 한니발의 이 전술을 일본에서도 그대로 도입했다는 것이다. 1183년 5월 11일 심야에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다이라꾸 씨의 10만 대군을 '구리카라' 고개 전투에서 쳐부수었는데 이때 쇠뿔에 횃불을 매달고 추격하여 다이라 씨 군대를 격파했다. '구리카라'라는 명칭은 칼리쿨라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니발은 로마의 지휘관 파비우스를 경계했지만 로마 시민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히려 용감하게 결전에 임하지 않은 것을 문제삼아 파비우스를 해고하고 신임 집정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와 루키우스 아밀리우스 파울루스에게 군대의 총지휘권을 맡겼다.
기원전 216년 6월, 바로와 파울루스는 칸나이 평원에서 보병 8만, 기병 6천의 로마 군을 이끌고 정면으로 카르타고 군에게 접근했다. 한니발 휘하의 군대는 오래된 정군 2만 명, 시원찮은 갈리아 병사 1만 5천 명, 그리고 최강의 기병 1만 명이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고대사상 최대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오판토 강에 도착한 로마 군은 전통적인 대전투형으로 포진했다. 정규 군단의 병사들을 중앙에 두껍게 배치하고 양 날개에 기병대와 각 속주에서 징발한 소대를 배치했다. 한편 한니발은 앞이 볼록한 변형된 초승달 대형으로 군대를 정렬시켰다.
전투는 한니발의 예상대로 전개됐다. 로마 군 중앙에 밀집된 보병부대는 카르타고 군의 돌출된 중앙부에 배치된 갈리아·에스파냐 부대를 습격했다. 갈리아 병사들과 에스파냐 병사들은 점점 후퇴했고 로마 군은 중앙을 돌파하기 위해 더욱 공격해 들어갔다.
로마 군이 카르타고 군의 중앙으로 깊숙이 들어오자 양쪽 날개에 배치되어 있던 리비아 병사들이 좌우에서 로마 군을 공격했다. 초승달 모양이었던 한니발 군의 진용은 어느새 양 날개가 사라지고 중앙의 로마 군을 포위한 원형이 되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죽음의 포위진에 갇혀버린 로마 병사 2만 5천 명 전원이 전사했다. 그 주변에 있던 1만 5천 명도 살육당했으며 그 가운데는 집정관 파울루스와 80명의 원로원 의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카르타고 군의 전사자는 주로 갈리아 병사를 포함하여 6천 명 정도라고 하니 이는 어쩌면 전과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집정관 바로는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채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의 민중은 모두 나와 이 패장을 따뜻하게 맞이했고 결국 이 파국을 견뎌냈다.
칸나이 전투에서 보인 한니발의 용병과 전술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투의 모범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당시 세계 최강의 로마 군대를 네 번 연속 물리친 것은 한니발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전투에서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전략을 들켜버리고 말았다. '기병의 이용 방법이야말로 승리의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로마 군이 알게 된 것이다.
조국의 배신으로 생을 마친 한니발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종족들은 한결같이 한니발을 칭찬하며 로마에 대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는 한니발과 우호 협정을 체결했다.
시라쿠사는 즉시 로마의 속주에서 벗어나 고대 최고의 수학자인 아르키메데스를 참모로 세워 로마 군에 대해 전투 태세를 취했다.
로마는 수년에 걸쳐 20만 명에 이르는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여 시칠리아 섬을 평정했다. 이로써 시라쿠사가 함락되었고 이때 아르키메데스도 살해되었다.
로마 군의 다른 일부는 에스파냐를 공격해서 하스드루발을 계속 괴롭혔기 때문에 한니발은 동생에게서 원군을 지원받지 못했다.
마침 이때 로마의 치욕을 일거에 설욕해 줄 명장이 탄생했다. 이미 두 번의 격전으로 용맹을 떨친 적이 있는 스물네 살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대 스키피오)였다. 에스파냐 전장에서 아버지와 백부가 쓰러지는 바람에 후임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일개 군을 통솔하는 장수가 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원로원과 민회 모두 이 명문가 출신의 젊은이를 인정하고 있었다.
젊은 스키피오가 에스파냐에 부임했을 때 로마 군은 카르타헤나 시를 포위하고 있었다.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바다와 이어져 있는 호수를 건너야 했는데 호수의 수심이 너무 깊어 중무장한 보병은 건너지 못한 채 수수방관하고 있었다. 그때 이 젊은 신임 대장은 장병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어젯밤 꿈에 해신 넵투누스가 나타나서 수심을 낮추어 주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건너기 시작했다. 호수의 간만을 이용한 것뿐이었는데 이를 지켜본 병사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신의 아들이다!"라고 감탄하며 차례로 호수를 건너갔다. 그리하여 스키피오의 군대는 카르타헤나를 단숨에 함락시키고 에스파냐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다.
로마 군의 일부는 한니발이 아풀리아(풀리아, 이탈리아 남동부)에 주둔하게 하고 그 사이 다른 일부가 하스드루발(한니발의 동생)을 습격하여 전멸시켰다. 로마 군은 전사한 하스드루발을 참수하여 목을 아풀리아로 가져와 한니발의 진지로 던졌다.
한니발은 점점 더 고립되어 갔다. 로마에 선전포고를 했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도 이미 로마와 화의를 맺었고 이탈리아 반도의 각 지역에서 반기를 들었던 종족들도 한니발에게 더 이상 지원을 하지 않았다.
카르타고 본국에서 원군으로 보낸 백 척이 사르데냐 섬 앞바다에서 80척의 로마 해군에 의해 침몰되었다. 강건함을 자랑하던 기마군단의 사기도 위축되었고 피로도 누적되었다.
마침내 에스파냐에서 개선해 돌아온 스키피오는 강력한 신군단을 이끌고 아프리카로 향했다. 이에 놀란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을 불러들이기로 했다. 한쪽 눈을 실명한 이 명장은 아홉 살에 떠났던 고국으로 36년 만에 돌아왔다.
그런데 그때까지 충실히 따라주었던 정예군단의 절반이 카르타고에서의 전투를 거부하고 나섰다. 한니발은 하는 수 없이 2만 명을 처형하고 자신을 따르는 남은 장병들을 이끌고 카르타고에 상륙하자마자 들판에 진을 쳤다.
양군이 비슷한 병력으로 대결하고 있는 중에 쫓기고 있던 누미디아의 마시니사 왕이 스키피오와 의기투합하여 무적의 기병군단을 이끌고 로마 군에 합류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한니발은 화평 교섭을 제의하며 스키피오와 회담을 가졌다. 양측 모두 진지하게 회담에 임했지만 화의는 즉시 결렬되었다.
한니발이 처음으로 수비의 입장이 된 이 전투에서 스키피오는 카르타고 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한니발도 모든 병력을 이용하여 스키피오를 바짝 공격하여 그의 손에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한니발은 진형을 재정비하여 끝까지 싸웠으나 2만 명의 병사가 쓰러지면서 그의 무운은 다하고 말았다.
필사적으로 도망쳐 카르타고로 돌아온 한니발은 원로원을 소집하여 패전 사실을 알리고 전면 항복에 대한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카르타고 원로원은 한니발의 목을 바치기로 결정하고 로마에 밀고를 했다. 한니발은 자신을 표적으로 삼은 암살단 세 명이 로마로부터 파견된 사실을 알아채고 즉시 카르타고에서 도망쳤다. 한니발은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대패하여 크레타 섬에서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아나톨리아)로 도망갔지만 이내 독배를 들이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예순일곱 살이었다. 그로부터 반년 후에 그의 호적수이자 숭배자이기도 했던 스키피오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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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명 — 갈리아키살피나, 누미디아, 로마, 론 강, 사군툼, 사르데냐 섬, 소아시아, 시라쿠사, 시칠리아, 아풀리아, 아프리카, 알프스, 에브로 강, 에스파냐, 오판토 강, 유럽, 이탈리아 반도, 지중해, 카르타고, 카르타헤나, 칸나이 평원, 크레타 섬, 크로톤, 터키, 트라시메노 호수, 트레비아 강, 티키누스 강, 포 강
- 사건 — 마그네시아 전투, 제2차 포에니 전쟁, 칸나이 전투
- 집단 — 갈리아인, 누미디아인, 로마 군, 리비아인, 에스파냐인, 원로원, 코끼리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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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사람을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 한 명이고, 괄호 안은 소속이나 시대 같은 구분자입니다. 검색하거나 발표 자료에 옮기실 때는 괄호까지 통째로 이름으로 쓰셔야 동명이인과 안 섞입니다.
아닙니다. 사진과 연대는 우리 자료가 아니라 위키미디어·위키데이터에서 따로 받아온 것이라 사람마다 있고 없고가 갈립니다. 인물 262명 중 사진은 164명, 생몰 연대는 168명에게 있습니다. 없는 자리는 지어내지 않고 비워 둡니다.이어서 Ab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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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 지명이 셋 있는데 너무 가까워 한 점으로 묶었다는 뜻입니다. 성소피아성당은 비잔티움에서 20미터 거리라 따로 찍으면 점이 통째로 포개져 아래 것을 누를 수 없습니다. 점 위에 마우스를 올리면 묶인 이름이 다 나옵니다. 30개 포인트에서 65곳이 이렇게 묶입니다.이어서 읽기
이 화면 밖에 있는 지명입니다. 지도는 그 포인트의 도시들이 잘 보이도록 범위를 잡는데, 그러다 보면 멀리 있는 지역이 화면을 벗어납니다. 안 그리면 본문에서 그 이름에 마우스를 올려도 아무 일이 안 일어나므로, 「저 바깥 이 방향」이라는 뜻으로 테두리에 붙여 둡니다. 정확한 자리가 아니라서 이름표는 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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