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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영웅과 이집트 여왕의 밀애
클레오파트라는 왜 카이사르를 선택했는가30포인트 편역본
고대 지리학자들을 고민하게 만든 것은 지구의 어느 지역을 이집트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물론 이집트는 아프리카 대륙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지만 소아시아(지금의 터키)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그곳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 기번
로마로 진군한 로마의 영웅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리미니 부근에는 아드리아해로 흘러 들어가는 작은 강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강을 루비콘 강이라고 불렀다. 이 강을 경계로 갈리아 총독은 강의 북안까지는 군대를 집결할 수 있었지만 강 건너 남쪽으로 병사들을 진격시키는 것은 법으로 강력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기원전 50년 겨울,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 북안에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는 내전을 피하기 위해 폼페이우스로부터 빌린 한 개 군단을 반환하고 원로원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한 개 군단은 동방작전에 투입했다. 그는 휘하의 군대를 해산할 것인지 아니면 공적소의 오명을 쓸 것인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었다. 군대를 해산하면 자신은 살해될 것이 분명했다.
카이사르는 최후의 결정을 부관인 쿠리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일임하고 사자를 원로원에 보내 자신의 서간을 읽도록 했다.
"10개 군단 중 8개 군단을 해산하겠으니 갈리아 속주 총독의 임기를 기원전 48년까지 연장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막다른 궁지에 몰린 카이사르는 10년 동안 고락을 함께해 온 신뢰할 만한 군단의 장병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전우 제군!"이라 부르며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고 로마 진격에 대해 의견을 구했다.
카이사르의 심복이었던 장병들 전원은 이에 찬성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갈리아의 피에몬테 롬바르디아 출신이었는데, 카이사르가 원로원의 반대를 누르고 이 지역 주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조국 로마'란 곧 카이사르를 의미했다.
카이사르가 "제군들에게 급여를 지불할 자금이 없는데"라고 말하자 그들 모두는 자신들이 모아둔 돈을 군단에 기부하면서 그것으로 자신들의 급여를 받기로 했다. 무급으로 일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탈주하여 폼페이우스의 군으로 들어간 사람은 유능한 부관 라비에누스 한 사람뿐이었다. 카이사르는 나중에 라비에누스에게 그의 짐과 급여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기원전 49년 1월 10일, 카이사르는 6천 명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넜다. 이 진군을 할 즈음 그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즉, '상황은 이미 결정 났다. 여기까지 온 이상 단행할 수 밖에 없다'라는 의미의 이 말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결행!'을 비유하는 문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카이사르 군이 폼페이우스의 6만 군대를 향해 진격을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군단이 합류했다. 또 현지 지원병으로 3개 군단이 급조되어 군세는 3만 5천 명을 넘어섰다.
로마로 진격하는 길목에 있던 도시들은 성문을 열어 그들을 환영하고 카이사르를 신처럼 떠받들었다. 이탈리아 각 지역 시민들은 보수적인 귀족들의 지배에 이미 염증이 나 있었으므로 원로원이 카이사르를 아무리 '반역자'로 각인시켜도 소용이 없었다.
카이사르는 각 군단 병사들에게 약탈 행위를 금지하도록 철저하게 주지시켰다. 체포도 추방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보수파와 손을 잡은 것을 후회하고 평민파의 민주주의 방침을 끝까지 고수하기로 했다. 폼페이우스와 많은 보수파 귀족들은 남단의 브린디시로 도망쳐 바다를 건너 에페이로스(지금의 알바니아)로 향했다.
3월 16일, 카이사르는 군단을 성문 밖에 주둔시키고 혼자 로마로 들어가 '독재관'의 칭호를 요구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는 물론, 국고 관리권도 거부했다. 그러나 하급 관리들은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열쇠를 카이사르에게 건넸다. 카이사르는 지금까지의 전투에서 얻은 막대한 전리품을 법에 따라 일단 국고에 환수했다가 그것들을 모두 다시 인출하여 군단의 창고로 집어넣음으로써 시민의 의무를 지켰다.
보수파는 군대를 집결해 세 방향에서 카이사르에 대한 반격을 시도했다. 장기전으로 로마의 병량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로마 제국의 역사를 바꾼 만남
내정을 재수립한 카이사르는 브린디시에 군을 집결하여 12척 함대에 2만 병력을 보유하고 폼페이우스 군대를 공격하기 위해 에페이로스로 떠났다. 그러나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으로 다수의 군선이 침몰해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과 함께 에페이로스 해안에 고립되고 말았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그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와 재공격을 했지만 승리하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안토니우스의 군대를 그리스의 테살리아로 전진시키고 자신은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폼페이우스의 진영에서는 아프라니우스가 "로마가 무방비 상태인 바로 이때 일거에 습격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여 카이사르 군을 뒤쫓아 이탈리아 반도로 되돌아왔다. 보병 5만, 기병 7천의 대군이 보병 2만 2천, 기병 1천 명으로 구성된 카이사르 군대를 바짝 추격하여 마침내 파르살루스(지금의 그리스 파르살라)의 들판에서 그들을 따라잡았다. 그때 폼페이우스 진영은 승리를 확신하며 대주연을 펼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참호 속에서 흙투성이가 된 채 보리와 양배추를 먹으며 작전을 세웠다. 그리고 다음날 결전에서 회심의 승리를 이루었다.
카이사르는 적병 1만 5천 명을 죽이고 포로 2만 명을 잡아들였다. 그러나 아군의 손해는 불과 20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포로를 관대하게 처리하도록 명령했다.
폼페이우스는 무능한 귀족들을 이끌고 라리사를 향해 멀리 달아났다. 패주하는 군단 속에는 카이사르의 신경에 거슬리는 젊은이가 자신의 운명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바로 귀족 브루투스였다. 그는 카이사르의 옛 애인 세르빌리아의 아들로 아버지가 카이사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브루투스는 라리사에서 카이사르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과 카시우스의 사면을 탄원했다. 카시우스의 아내는 브루투스의 이복 여동생 테르티아 어머니 세르빌리아에 이어 역시 카이사르의 연인이 된 여성이었다. 카이사르는 곧바로 두 사람을 사면했다.
폼페이우스는 해로를 통해 아프리카로 도망치기 위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근교에 배를 정박했다. 로마의 감독 아래에 있던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재상은 포티누스였다. 이 기회주의자는 파르살루스 전투의 결과를 듣고 숭자인 카이사르에게 아첨하기 위해 부하를 보내 배에서 내리는 폼페이우스를 등뒤에서 찔러 죽였다(기원전 48).
기원전 32세기부터 2600년에 걸쳐 이어진 이집트 왕조는 페르시아로 통합되었고, 그것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으로 이어졌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후에 부장인 프톨레마이오스가 기원전 310년에 이 땅에 왕국을 건설했다.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인구 50만 명으로 당시 서방 세계에서는 로마에 이은 대도시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을 비롯하여 그리스의 전통을 유지 계승하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하고 있었다.
이집트 왕가는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는 하지만 이집트 태고의 풍습인 형제 자매 간의 혼인으로 왕의 혈통이 계승되었다.
당시 열세 살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돌아가신 부친의 유언에 따라 일곱 살 연상의 누이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하여 공동 통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젊은 왕은 모든 일을 재상 포티누스에게 맡기고 그가 시키는 대로 행하고 있었다.
자신의 뜻대로 나라를 조종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포티누스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에서 추방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시리아의 사막으로 도망가서 소식을 끊고 있었다.
폼페이우스가 죽은 지 나흘 후에 카이사르는 선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리아에 입항했다. 상륙하자마자 그가 처음으로 건네받은 것은 폼페이우스의 머리였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재상 포티누스, 아킬라스 장군, 이 세 명은 드높은 명성을 가진 총독 카이사르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그들에게 "왕과 그 누이인 클레오파트라 7세 사이에 일어난 내분을 내가 중재하겠다"는 내용을 전달했다.
왕의 고분관들에게 이것은 적잖이 성가신 문제였다. 클레오파트라가 궁정으로 돌아와서 카이사르와 의기투합한다면 그들 모두는 지위를 잃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로 통하는 전 도로에 관소를 설치하고 비상망을 구축하여 클레오파트라의 체포와 암살을 기도했다.
그날 심야에 왕실 전용 선착장에 작은 배 한 척이 도착했다. 배에서는 둥그렇게 말린 여행용 융단을 어깨에 짊어진 한 남자가 내렸다. 그가 두 개의 외벽을 지나 위병소에 다다랐을 때 카이사르의 경비병이 검문을 했다. 남자는 자신은 시칠리아 사람으로 여왕의 명령을 받들어 총독 각하에게 전할 전언과 선물을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카이사르의 집무실에 끌려온 이 남자는 융단을 발 밑에 내려놓고 명령을 기다렸다. 카이사르가 융단을 펼쳐보라고 명하자 그는 여왕이 반드시 카이사르 혼자 있을 때 펼쳐 보이라고 명령했다고 말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카이사르는 근위병에게 물러나 있으라고 명했다. 남자가 융단을 천천히 펴자 그 속에서는 손발이 가늘고 균형 잡힌 몸을 가진 작은 여자가 튀어 나와 기지개를 켜더니 미소를 띠며 카이사르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녀는 스무 살의 클레오파트라였다. 카이사르도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클레오파트라는 환상적인 술책으로 카이사르와의 '공모'에 성공하여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후대에 전해져 내려오는 것처럼 클레오파트라가 절세의 미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카이사르가 그녀에게 사자를 보냈고, 자신의 부관들에게는 그녀가 오면 곧바로 자신에게 안내하라고 명령해 두었었다. 두 사람의 만남 자체가 일종의 공모였는데, 그것을 실행하는 데 있어 클레오파트라의 발상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기발한 것이었다.
눈부신 금발을 가진 스무 살의 이 여왕은 가느다란 몸매를 독창적인 화장기법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듯한 감미로운 목소리에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있었던 그녀는 매력이 넘쳐흘렀다. 오랫동안 전장에서 금욕 생활을 해왔던 카이사르는 그녀를 보자마자 욕망의 포로가 되었다.
고락을 함께한 군단의 반항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불러 남매 간의 화해를 공표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재상 포티누스를 처형했다. 그러나 왕은 누이가 자신과 왕권을 나누어 가질 생각이 없음을 한눈에 간파하고 이집트 전군에게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하도록 명령했다.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은 카이사르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그곳에 주둔해 있던 로마 군의 일부도 그에 동조하여 카이사르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카이사르는 소부대를 이끌고 왕궁에서 방어하면서 시리아에 급사를 파견해 원군을 요청했다. 그리고 항구에 정박해 둔 로마 군선이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불태워버렸다. 그런데 그 불똥이 알렉산드리아가 자랑하던 대도서관에 옮겨 붙는 바람에 고대 그리스의 귀중한 서적들이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그 소식을 듣고 카이사르도 몹시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이집트 군의 추격에 쫓긴 카이사르는 바다를 건너 파로스 섬으로 도망을 갔다. 카이사르의 운이 다한 것으로 생각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그의 군대를 소탕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용감하게도 계속 카이사르를 옹호했다.
얼마 후 로마의 대군이 이집트로 진격해 오면서 전황은 역전되었다. 나일 강 호반의 이집트 군을 급습한 카이사르는 그날 안에 적병 2만 1천 명을 무찔렀으며 그중에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알렉산드리아 전쟁'으로 인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카이사르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로마의 속주로 여기지 않고, 이 나라의 관습에 따라 남매 간의 결혼을 통해 왕위를 계승시켰다. 겨우 열 살밖에 안 된 남동생을 프톨레마이오스 14세로 추대하여 클레오파트라와 '형식상'의 결혼을 시켰던 것이다.
한편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는 '사실상'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9개월간 지속된 결혼 생활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카이사리온이 태어났다.
애초에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를 병합하는 도구로 이용하려고 했었다. 한편 클레오파트라 역시 카이사르를 이용해 왕국을 자기 손 안에 넣으려고 했으며 목적을 달성하면 그를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총독과 여왕의 지위를 넘어서서 격렬한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이때 망명지 마살리아(마르세유)에서 돌아온 밀로가 사병을 거느리고 영역을 침범하자 로마는 카이사르에게 몇 차례 귀환을 권유했다.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총독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에게 밀월 여행을 제안했다. 이것이 '나일 강 대여행'이다. 클레오파트라는 '현재'의 최강국 로마에서 온 카이사르에게 3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과거' 이집트 왕조의 유산을 과시하고 싶었다.
두 사람은 이른바 '바다 위에 떠 있는 궁전'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실 전용선을 타고 여행을 떠났다. 이 배에는 대연회장 이외에 그리스풍의 큰 방, 연회실, 휴게실, 침실, 온실 등이 완비되어 있었다. 수행하는 선단은 400척으로, 경비 군선, 교대요원선, 요리용 선박, 악단선, 상용선, 수송선 등이 뒤를 따랐다. 이 여행은 호사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화려한 잔치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를 출발한 배는 마치 거대한 황금 새처럼 나일 강 위를 가르며 나아가 3주 후에는 고대 도시 테베에 도착했다. 스핑크스, 아몬 신전, 룩소르 등의 거대 조각상들을 보고 카이사르도 경탄을 금치 못했다. 5주일째에는 아스완 제1폭포까지 이르렀는데 여기서 그들은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야 했다. 로마 군단에 동요가 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발 전부터 이집트에 주둔해 있던 로마 군은 이 대대적인 여행에 반발하고 있었다. '카이사르 장군이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결혼하여 지중해 제국의 왕이 되어 영구히 이집트에 머물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고, 그 소문의 강도는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그들이 아스완 폭포에 도착했을 때는 인솔 부대의 모든 장병들이 더 이상의 수행을 거부했고 심지어 반란을 일으킬 움직임까지 보였다.
루비콘 강을 함께 건넌 갈리아 병사들이 주체가 된 군단이 명령을 거부하려 들자 카이사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등장 객체
- 인물 — 기번, 라비에누스, 렌툴루스, 마르켈루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밀로, 브루투스, 세르빌리아, 아킬라스, 아프라니우스, 알렉산드로스 대왕, 카시우스, 카이사르, 카이사리온, 소 카토, 쿠리오, 클레오파트라 7세, 키케로, 포티누스, 폼페이우스, 프톨레마이오스,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프톨레마이오스 14세
- 지명 — 갈리아, 갈리아 속주, 그리스, 나일 강, 라리사, 로마, 로마 제국, 루비콘 강, 리미니, 브린디시, 소아시아, 시리아, 시칠리아, 아드리아해, 아스완 제1폭포, 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 에스파냐, 에페이로스, 이집트, 이탈리아, 이탈리아 반도, 지중해, 터키, 테베, 테살리아, 파로스 섬, 파르살루스, 페르시아
- 시대 — 고대 그리스
- 집단 — 그리스, 로마 군, 원로원
이 포인트의 관계망
이 대목에 나온 관계 23건입니다. 점을 끌어 옮기고 휠로 확대할 수 있습니다.관계가 달린 것만 그립니다. 이름만 나온 인물·지명은 아래 목록에 있습니다.자주 묻는 것
다른 책입니다. 30포인트 편역본은 한국어 편역이고 원전은 기번의 영문입니다. 섞어 인용하면 사실관계가 어긋납니다. 인물·관계 자료는 편역본 계통에서만 뽑았습니다.
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입니다. 괄호를 내용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포인트 한 장이 약 1만 자, 5천 토큰입니다. 어느 AI 창에도 그냥 들어갑니다. 잘라 붙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있습니다. 포인트 01·02 본문 45건을 사료와 대조해 심각한 오류 6건을 찾았습니다. 전투 승패가 뒤집힌 서술이 두 장에 하나꼴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기준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