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 21
역사에 길이 남을 세계 도시 건설
콘스탄티누스는 왜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는가30포인트 편역본
네 황제의 후계자 다툼
그렇다면 왜 수도를 '영원의 도시'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긴 것일까. 그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어떻게 정제가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이야기는 트라야누스 황제(98~117 재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점차 규모가 거대해지자 제국 구석구석까지 모두 통제하기는 어려웠다. 3세기에 들어서자 각지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에서 '황제'를 사칭하는 자가 속속 등장하여 약 50년간에 걸쳐 26명이나 되는 황제가 난립하는 등 대혼란의 시대를 겪게 되었다. 이 혼란을 수습한 것이 284년에 즉위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 재위)였다.
그는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전제군주제를 시행하면서 거대화된 제국을 4분할하여 통치했다. 그러나 이 정책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네 명의 황제(정제)를 옹립함으로써 후계자 다툼이 야기되었다.
제위를 놓고 벌어진 전쟁에서 살아남은 것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였다. 그 전쟁의 마지막 장면을 여기서 소개하려고 한다.
그러나 비잔티움은 좀처럼 함락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수비가 든든한 데다 리키니우스가 제해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공격을 해도 리키니우스 측의 물자는 부족함이 없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들 크리스푸스에게 리키니우스 함대를 격파하여 제해권을 빼앗도록 명했다.
전투는 이틀에 걸쳐 이어졌다. 첫날은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고, 양측 함선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틀째에 들어서서 크리스푸스가 공격을 망설이고 있을 때 마침 남쪽에서 강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크리스푸스가 이끄는 함대는 그 기세를 타고 리키니우스 측 함대의 한복판으로 돌진했다. 일견 무모해 보이는 이 작전이 성공하면서 크리스푸스 군은 눈 깜짝할 사이에 승리를 거뒀다. 기번에 따르면 이때 크리스푸스 군이 파괴한 적선은 330척, 피해를 입은 적병은 5천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리키니우스 함대의 제독 아반두스는 목숨만 겨우 부지한 채 비잔티움으로 도주했다.
37년 만에 단독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마르티니아누스리키니우스에 의해 부제로 임명되어 비잔티움을 맡은 인물. 콘스탄티아의 약속에 따라 처형되었다.
리키니우스가 병사를 소집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전군을 결집하여 결전에 나섰다. 머릿수는 갖추어졌지만 리키니우스의 병사들은 분명 훈련과 장비가 부족해 보였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리키니우스 측의 전사자는 무려 2만 5천 명에 달했다. 이제 리키니우스의 운이 다한 것이다. 그는 니코메디아로 퇴거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섭을 유리하게 진행하기 위한 시간 벌기 작전이었다.
그때 리키니우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친 자가 나타났다. 그의 아내 콘스탄티아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여동생이기도 한 그녀는 혈연을 이용해서 '비잔티움에 남아 있는 마르티니아누스를 죽이고 퇴위하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앞에 엎드려 지금까지의 일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그동안의 과오를 모두 용서받은 리키니우스는 그 날 밤에 황제가 여는 축하연에 초대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었다. 축하연이 끝나자마자 황제는 리키니우스를 체포하고 유폐시켰다. 그 뒤 곧바로 처형되면서 그의 이름에는 불명예의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신전에 남겨진 그의 조상상은 모두 파괴되었고 법률과 재판 소송도 무효가 되었다.
놀랍게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리키니우스가 행한 모든 것을 철저하게 소멸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들은 너무 성급하게 내려져서 황제 스스로 철회한 것도 적지 않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로마 제국의 4분할 통치를 시작하고 나서 37년 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다시 한번 로마는 1인 황제 체제로 통일되었다.==
부와 안전, 아름다움을 갖춘 비잔티움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대내외의 적에 대비해 항상 임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 상황을 기번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어떤 때는 태연하면서도 위엄 있는 태도로, 또 어떤 때는 질풍노도와도 같은 신속함으로 광대한 영토를 변경에서 변경으로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자신의 몸이 노쇠해 가는 것을 느끼면서 나이를 의식하게 되자 제도에 어울리는 장소를 찾았다.
바로 그러한 조건을 갖춘 곳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세운 니코메디아가 있었다. 그곳이라면 천도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인을 박해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거슬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가슴속에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여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전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권력과 재력을 손에 넣은 자가 마지막으로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선택한 곳은 비잔티움이었다. 그는 리키니우스와의 전쟁을 통해 그곳이 천연의 요새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통감했다. 게다가 교역의 장소로도 최적지라고 판단했다.
==항구는 보스포루스와 헬레스폰투스(지금의 다르다넬스), 두 해협에 의해 보호되고 있었다. 게다가 비잔티움에는 일곱 개의 언덕이 있어서 그곳에서 아시아와 유럽, 양 방향의 해안을 조망할 수 있었다. 대륙으로 이어지는 길은 좁았고 방위 측면에서도 안성맞춤인 땅이었다. 기후 또한 온난했고 토지는 비옥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부와 안전, 그리고 아름다움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비잔티움이 새로운 수도로 최적지라고 생각했다.
황제의 이름으로 세워진 새로운 수도
예로부터 위대한 도시가 만들어지는 경우, 어떤 영험한 경험이나 전설이 그 장소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상례이다. 비잔티움도 예외는 아니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비잔티움의 성에서 잘 때 꾼 꿈 때문에 이곳을 새로운 수도로 결정했다고 한다.
꿈속에서 비잔티움의 수호천사가 다 쓰러져가는 노파의 모습으로 나타나더니 잠시 후에 그 노파가 갑자기 젊은 처녀로 변신했다는 것이다. 또 신수도 건립에 대한 에피소드도 남아 있다.
신수도의 경계를 정할 때의 일이었다. 황제가 한 손에 창을 들고 하염없이 경계를 확장해 나가자 이에 놀란 신하가 용기를 내서. "폐하, 대도시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만.." 하고 진언했다. 그때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 앞에 걸어가는 이[주]가 가는 데까지이다."
신하와 시민들은 존경과 경외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것이 연기였다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민심을 장악하는 데 탁월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수도 건설은 일견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장인의 수나 질이 황제가 바라는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 기간 계속되어온 내전으로 인해 건축 기술이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돌연 칙령을 발포하여 각 속주에 학교를 창설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학교가 완성되자 교사를 임용하여 우수한 젊은이들에게 건축을 가르치고 연구하도록 지시했다.
그리하여 신수도는 모두 이 시대 최고의 장인들 손으로 완공되었다. 그러나 조각상이나 장식품만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의 저명한 예술가들이 만든 것 이상의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
황제는 "신과 영웅, 그리고 시인들의 훌륭한 조각상이나 장식품을 제출하라"는 칙령을 발포하여 그리스와 아시아 각 지역에 세워진 전승 기념비와 종교 건축물에 장식되어 있는 예술품을 수도로 가져오게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당시의 사가 케드레누스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신수도에 없는 것은 오직 역사적 기념비가 표현하고자 하는 위대한 인물들의 혼뿐이다."
어떤 문헌에 따르면 이때 신수도에는 카피톨이라는 대학 하나, 대경기장 하나, 극장 2개, 공중목욕탕 8개, 개인 욕탕 153개, 주랑 52개, 창고 5개, 수도 시설과 저수지 8개, 원로원과 법정을 위한 거대한 홀 4개, 교회 14개, 궁전 14개, 그리고 귀족들의 저택이 4388호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이 엄청난 수의 건물은 불과 수개월 만에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벼락치기 공사는 그만큼 부실한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지어진 건물 대부분이 다음 세대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여하튼 신수도는 완성되었고,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신수도의 창건자로서 이 도시가 완전히 새로운 향기에 싸여 있는 동안 낙성식을 개최했다. 이 행사에서 신수도에 '제2의 로마', 또는 '신로마'라는 명칭을 부여한다는 것을 통보하고 그 칙령을 대리석에 새겨놓았다.
그러나 실제로 이 도시가 '신로마'로 불린 적은 거의 없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 신수도는 콘스탄티노플로 불렸다. 그의 소망대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기는 데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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