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 11
서서히 다가오는 쇠락의 징후
네로 황제 이전의 로마 제국30포인트 편역본
평화 속의 잔혹 통치, 티베리우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부터 제4대 클라우디우스, 제5대 네로 황제가 집권하던 시기를 카이사르가 의도한 '대로마 제국'을 실현한 왕조라는 의미에서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공화제 말기의 인맥·혈족주의가 불러온 온갖 부패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14~37 재위)는 불운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 리비아는 그와 남동생 드루수스를 데리고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에게 시집을 갔는데, 의붓아버지에게 총애를 받은 동생이 밝고 직선적인 성격이었던 데 반해 그는 내성적이고 신경질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을 아껴가며 화문에 정진했고 그리스어에 정통했으며 천문학의 '마술사'라 불릴 정도로 천문학에 뛰어났다. 또 군대를 이끌고 주변 여러 부족을 정복하면서 속주 통치에서도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결코 유흥에 빠지지 않았으며 대장군 아그리파의 딸 빕사니아와 결혼할 때까지 여자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장병들은 모두 그의 금욕적인 생활을 경외했다. 그러나 그를 불행하게 만든 것은 어머니의 허영심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의 정략결혼은 황제보다 어머니가 더 바라던 일이었다.
아내의 문란한 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는 로도스 섬으로 도피하여 그곳에 암자를 짓고 농사를 지으며 은거 생활을 했다. 손자 둘을 잃은 황제는 그를 다시 불러들여 후계자로 임명했지만 의심이 많은 의붓아버지 때문에 두 사람은 종종 심하게 부딪혔다.
아우구스투스가 죽었을 때 티베리우스의 나이는 쉰다섯 살이었다. 그는 원로원에 출석하여 황제의 지위에서 사퇴하고 공화제 부활을 희망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가 연극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본심을 드러내지 말고 제위에 오를 것을 간청했다. 비록 주변의 부추김으로 황제가 되었지만 그는 공정하고 적확한 치세로 일관하여 로마 제국은 국력을 배가시킬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드루수스와 안토니우스의 딸 안토니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를 양자로 삼아 일단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한 다음 그를 멀리하다가 결국에는 살해했다고 전해진다. 사건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시민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이 쾌활하고 용감한 미소년을 질투하여 오리엔트 속주의 총독으로 임명했다가 임지에서 독살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게르마니쿠스의 어머니인 안토니아는 티베리우스를 원망하지 않았지만 게르마니쿠스의 미망인인 아그리피나(아우구스투스의 손녀)는 끈질기게 그를 원망했다. 아그리피나는 제5대 황제 네로의 할머니이다. 그녀는 티베리우스의 양자 게르마니쿠스와 결혼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의 며느리이며, 동시에 그녀의 어머니 율리아가 티베리우스에게 시집 올 때 데리고 온 아그리파의 딸이기도 했다.
아그리피나는 어머니 율리아의 좋지 않은 면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러나 율리아가 지녔던 애교나 직선적인 성격, 빠른 두뇌 회전이나 기지 등 좋은 점은 어느 것 하나 물려받지 못했다.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가 남편을 죽였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면서 아들인 네로(네로 황제의 백부)가 당연히 황위 계승자가 되어야 한다고 황제를 다그쳤다. 물론 티베리우스에게도 전처 빕사니아가 낳은 친아들 드루수스가 있었지만 이 또한 소행이 좋지 못하여 황제는 이 두 사람 모두 후계자로 세울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황제가 총애하던 신하이자 친위대장인 세야누스가 황제 암살 음모를 파헤쳤다고 발표했다. 그는 황제의 신뢰를 얻게 되자 친위대의 권한으로 황제의 명령을 제멋대로 바꾸어 로마의 실질적인 지배자로 행세했다. 그는 포파이우스 사비누스, 아그리피나, 네로가 주도한 암살 음모의 증거를 입수했다고 발표하면서 포파이우스를 처형하고 아그리피나를 유배 보냈으며 네로를 자살로 내몰았다.
비슷한 시기에 황태후 리비아(반농담으로 '조국의 어머니'라 부르던)와 왕자 드루수스도 죽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친족의 연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세야누스는 황제 암살 음모를 기도했다.
이 음모를 티베리우스에게 알려준 것은 제수 안토니아였다. 그녀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카프리 섬으로 밀서를 보냈다. 황제는 즉시 명령을 내려 반역자인 세야누스를 체포하고 원로원의 심리에 맡겼다. 수년간에 걸쳐 그에게 배신당하고 농락당해 왔던 원로원은 세야누스의 친족과 친구까지 모두 처형했다.
세야누스의 아내는 자살을 했는데, 황제 앞으로 쓴 유서에서 안토니아의 딸 리빌라(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의 아내이기도 하다)가 세야누스의 정부이며 공범이라고 고발했다. 티베리우스는 며느리이자 조카인 그녀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었다. 그녀는 옥중에서 단식 끝에 죽었고, 아그리피나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살인과 배신이라는 지옥의 구렁텅이 속에서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실제로 정신 이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는 그칠 줄 모르는 광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티베리우스의 치세 아래에서 로마는 분명 평화로웠으며, 황제도 선정을 베풀었다. 국고는 풍부했고 정치도 안정되어 있었지만 그 번영 때문에 오히려 로마 시민들의 부패와 퇴폐적인 생활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이것이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의 실태였던 것이다.
티베리우스는 이러한 전략을 막는 개혁의 수완가로서 사망한 양아들 게르마니쿠스와 악녀 아그리피나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가이우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37년에 카프리 섬에서 나온 티베리우스는 캄파니아에 도착했을 때 심근경색 발작을 일으켜서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광기의 혈통, 칼리굴라
가이우스 게르마니쿠스는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부임한 게르마니아(지금의 독일)의 진중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큰 유아용 군화(칼리굴라)를 신고 자랐기 때문에 장병들은 모두 그를 칼리굴라라는 애칭으로 불렀고 그것이 후에 황제의 이름이 되었다.
칼리굴라(37~41 재위)는 즉위하여 1, 2년간은 선정을 베풀었다. 시민에 대한 배려가 깊었고 무인으로서의 용기와 성실함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랬던 그에게 갑자기 정신 장애가 일어났다.
특히 비가 오거나 강풍이 부는 밤에는 공포감이 극에 달해 발작을 일으켰다. 그럴 때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궁전 안을 뛰어다녔다. 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거울 앞에 앉아 몇 시간 동안이나 온갖 표정을 지어보곤 했다.
또 한때는 이집트 문화에 심취해서 누구를 막론하고 인사할 때는 발에 키스를 하도록 강요했고 원로원 의원을 경기장에서 검투사와 싸우게 하여 차례로 죽였다. 호민관에게는 자신이 타는 말을 가려내게 했고, 대리석으로 된 마구간과 상아로 된 말구유를 만들게 했다. 결국 그는 이집트 왕실의 선례에 따라 친여동생 드루실라와 결혼했으며 제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곧바로 이혼하고 가이우스 피소의 결혼식 날 그의 신부를 빼앗아 자신의 아내로 삼기 위해 네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때로는 예의 바르고 상냥하며 재치 있는 익살도 부려가며 말도 잘했지만 다음날 눈을 뜨면서부터 갑자기 대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궁정에서 대머리가 눈에 띄는 대로 경기장의 맹수 우리 속에 던져넣으라고 명령했다.
또 어떤 날은 느닷없이 철학자를 혐오하며 모든 철학자들을 사형이나 유형에 처했다. 이때 유일하게 화를 면했던 사람은 역사를 집필하면서도 뇌에 장애가 있다고 여겼던 숙부 클라우디우스와 중병으로 곧 죽을 것으로 생각했던 스토아 학파의 거장 세네카뿐이었다.
또 칼리굴라는 할머니인 안토니아에게 "머리와 허리의 균형이 잡히지 않았으니 세상을 뜨십시오!"라고 말하여 자살을 강요했다.
최후의 마무리는 유피터(주피터, 제우스) 대신에 대한 생트집이었다.
"신계의 왕위 약탈자!" "허풍선이!"라는 욕을 퍼부으면서 신상의 머리를 깨부순 뒤에 자신의 두상과 바꿔치기를 하는 등의 폭거를 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로마 시민은 더 이상 아무도 이 폭군의 잘못을 질타하지 않았다. 더구나 제국의 수도에서는 황제의 횡포를 흉내내는 자들로 넘쳐나고 있었지만 모두가 본 체 만 체했다.
그 재앙의 씨앗을 근절시킨 것이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였다. 평소에 황제로부터 자주 모욕을 당해 한을 품고 있던 카이레아는 어느 날 밤 궁정 내 극장의 복도에서 황제를 찔러 죽였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이 또한 칼리굴라 황제가 장난을 친 것으로 생각했다. 즉, '자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누가 좋아하는지를 보고 그 자를 처벌하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친위대는 황제의 죽음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죄 없는 황비 카레소니아를 죽이고 그도 모자라 어린 황녀까지 죽였다. 이렇게 해서 칼리굴라의 재위는 불과 5년 만에 막을 내렸다.
클라우디우스의 뛰어난 치세
친위대는 제4대 황제로 자신들 뜻대로 조종할 만한 사람을 추대했다. 친위대가 그 희생자로 내세운 사람은 바로 칼리굴라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41~54 재위)였다. 그는 손발이 불편했고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칼리굴라가 암살되던 날에는 기둥 뒤에 숨어서 떨고 있던 인물이었다.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조카이기도 했던 그는 여러 차례에 걸친 궁정의 참극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그는 거품을 물고 격렬히 논쟁했으며 배불뚝이에다 주독으로 인해 코는 늘 새빨갰다.
그의 이런 모습은 기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덕분에 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고 특히 역사 서적을 탐독하여 스스로 집필할 정도였다. 그 밖에 지리와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클라우디우스는 41년에 즉위하면서부터 뛰어난 치세를 펼쳤다. 그는 먼저 친위대에게 충분한 보수를 주었고 그 대신 '황제는 죽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고히 했다. 그 본보기로 칼리굴라의 암살범을 인도하도록 요구하여 그를 처형했다. 이어서 선제 칼리굴라가 발포한 법령을 모두 폐지했다.
또 대규모 공공사업을 차례로 기획하고 그 계획을 입안하는 데 직접 참가했다. 그는 부패한 원로원 의원에게 부탁하지 않고 해방 노예층 가운데 유능한 인재를 뽑아 등용했다.
특히 클라우디우스가 열중한 것은 푸키누스 호수의 간척사업이었다. 3만 명의 노동자를 투입하여 11년의 공기 끝에 운하를 파고 배수에 성공했다. 또 공사의 마지막을 '모의 해전'이라는 전투 경기 시합으로 장식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사형수 2만 명이 동원되어 호수 위에 군선을 띄우고 홍백 양군으로 나뉘어 실제로 서로를 죽이는 싸움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적선에 자신들의 배꼬리를 부딪쳐서 호수 밑으로 침몰시켰다. 주변의 언덕에서 진을 치며 이 모습을 지켜본 관객들은 이 볼거리를 주최한 황제를 찬양하며 열광의 도가니 속에 흠뻑 도취되었다.
43년에 클라우디우스는 브리타니아(지금의 잉글랜드) 정토에 나섰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출정한다고 선언하자 모든 로마 시민들이 비웃었다. 전투 경험이 전혀 없었던 황제가 군대를 지휘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최초의 전투에서 분명 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예상은 그대로 적중하여 얼마 후에 황제의 전사 소식이 전해졌다. 그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모두 이 사랑스러운 애주가 황제를 애도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보였다. 클라우디우스는 건강하게 활약하고 있었다. 질타와 격려로 장군들을 통솔하며 브리타니아를 정복하고 적의 왕을 체포하여 돌아왔으며, 또한 전례를 깨고 이 왕을 구명하는 정치적 수완을 보였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피 속에 흐르는 '광기'를 거스르지는 못했다. 그것은 여자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었다. 병약했던 클라우디우스는 적어도 그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젊은 시절부터 대단한 호색가였다. 세 번에 걸쳐 이혼을 한 그는 쉰 살 가까운 나이에 열여섯 살의 메살리나와 결혼했다. 추녀에 가까운 이 황후 메살리나는 '동서고금의 황후 기운데 가장 파렴치한 여자'로 전해질 정도로 남성 편력이 심했다.
언젠가 한번은 이 젊은 황후가 한 시종에게 다가가 유혹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자 황제에게 그 시종이 자신의 말을 따르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클라우디우스는 "그러면 나 역시 당신과 마찬가지로 마음에 드는 시녀에게 손을 내밀어도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녀가 그것을 인정하자 황제는 그 시종에게 그녀의 말을 따르도록 칙령을 내렸다.
그러한 행동들이 점점 심해지면서 황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메살리나는 새로운 정부 실리우스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놀란 대신들은 황제에게 급보를 보내 '실리우스의 야망은 제위 찬탈'이라고 전했다.
그 소식을 듣고 돌아온 클라우디우스는 간부를 죽이고 친정으로 도망간 황후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녀의 친정으로 간 사자는 나중에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 가로막고 선 그녀의 친정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메살리나를 찔러 죽임으로써 이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다음해인 49년에 클라우디우스는 아무 두려울 것이 없는 아그리피나를 다섯 번째 아내로 맞이했다. 그녀는 게르마니쿠스와 악녀로 유명한 아그리피나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실상 황제의 질녀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부모는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동생 드루수스와 안토니우스의 딸 안토니아였다. 또 증조부모는 대장군 아그리파와 신과도 맞먹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사랑하는 딸 율리아였다. 게다가 계보상으로는 저 전설적인 왕 카이사르가 5대조였기 때문에 전 로마 시민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출신 성분을 자랑하고 있었다.
클라우디우스와 아그리피나의 혼인은 카이사르가 의도하고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가 진척시킨 '대로마 제국 독재왕 이라는 광기의 혈통이 집약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한 집안 내에서 나란히 그 혈통을 이어받은 황제와 황후, 그리고 클라우디우스의 전처가 낳은 황자 브리탄니쿠스, 아그리피나가 데려온 아들 네로가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이다.
아그리피나는 '네로 황제 만들기'에 모든 것을 걸었고 또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것은 중간에 좌절되었던 오빠의 소망을 대신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자신이 여제로서 군림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남편의 정력을 바닥내고 깔아뭉개는 일은 간단했다. 충신들을 점점 멀리하게 하고 스토아 학파의 거장 세네카를 네로의 스승 겸 후견인으로 삼았으며 친구인 부루스를 친위대장으로 임명해 공포 정치를 개시했다.
먼저 브리탄니쿠스의 제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네로를 클라우디우스의 양자로 만들어 나란히 제위 계승자에 올렸다. 그리고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은 차례로 처형했다. '사형선고문'에 있는 황제의 서명은 모두 가짜였다. 예순이 넘은 클라우디우스는 노쇠하여 정신이 몽롱했지만 다행히도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측근과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아그리피나는 독이 든 요리를 그에게 먹여 독살했다. 이때 클라우디우스의 나이는 예순셋이었다.
등장 객체
- 인물 — 가이우스 피소, 게르마니쿠스, 기번, 네로, 드루수스, 드루실라, 리비아 드루실라, 리빌라, 마르쿠스 아그리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메살리나, 부루스, 브리탄니쿠스, 빕사니아, 세네카, 세야누스, 실리우스, 아그리피나, 아그리피나(클라우디우스의 아내), 아우구스투스, 안토니아, 율리아 (아우구스투스의 딸), 카레소니아, 카시우스 카이레아, 카이사르,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티베리우스, 포파이우스 사비누스
- 지명 — 게르마니아, 독일, 로도스 섬, 로마, 로마 제국, 브리타니아, 오리엔트, 이집트, 카프리 섬, 캄파니아, 푸키누스 호수
- 사건 — 모의 해전
- 시대 —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 팍스 로마나
- 집단 — 검투사, 로마 시민, 원로원, 친위대
- 저작 — 그리스어
이 포인트의 관계망
이 대목에 나온 관계 25건입니다. 점을 끌어 옮기고 휠로 확대할 수 있습니다.관계가 달린 것만 그립니다. 이름만 나온 인물·지명은 아래 목록에 있습니다.자주 묻는 것
다른 책입니다. 30포인트 편역본은 한국어 편역이고 원전은 기번의 영문입니다. 섞어 인용하면 사실관계가 어긋납니다. 인물·관계 자료는 편역본 계통에서만 뽑았습니다.
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입니다. 괄호를 내용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포인트 한 장이 약 1만 자, 5천 토큰입니다. 어느 AI 창에도 그냥 들어갑니다. 잘라 붙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있습니다. 포인트 01·02 본문 45건을 사료와 대조해 심각한 오류 6건을 찾았습니다. 전투 승패가 뒤집힌 서술이 두 장에 하나꼴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기준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