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 18
페르시아 군에게 체포당한 황제
30포인트 편역본
혼란과 재앙의 시대를 이끈 명군
갈루스 황제의 감찰관이었던 발레리아누스는 고트족에게 시달렸던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주둔군을 구원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이 임무는 성공적으로 수행했지만 주군인 갈루스 황제를 위기에서 구해내지는 못했다. 발레리아누스는 고결하고 충성심이 강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설사 갈루스가 무능한 황제라 하더라도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발레리아누스 군이 쳐들어온다."
스폴레토 평원에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이밀리아누스 군 병사들은 전율했다. 아주 쉽게 고트족을 격퇴시킨 그의 군대가 쳐들어오면 자신들은 잠시도 지탱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이밀리아누스는 바로 직전까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병사들의 손에 살해되고 말았다. 그가 제위에 올라 있었던 기간은 불과 4개월이었다.
뜻밖의 횡재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혁명과 모반, 그리고 배신이 소용돌이치던 그 시대에 발레리아누스(253~260 재위)는 어떠한 부정행위도 없이 제위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운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귀족 출신이면서도 온화한 성품을 가졌던 그는 사생활에서 한 점의 오점도 남기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지녔던 그는 황제가 되기까지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군대뿐만 아니라 원로원 의원과 관료, 시민들에게도 존경을 받아왔다.
한 고대사가는 "주군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면 반드시 발레리아누스가 황제로 뽑혔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다시 말해 그는 황제라는 이름에 걸맞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순인 발레리아누스에게 대로마 제국의 통치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로마 제국은 사방으로 야만족의 침략을 받고 있었던 데다 국내에서는 모반이 끊이지 않았다.
그 스스로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보다 젊고 활동적인 공치제를 찾았다. 감찰관이었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라면 어떤 인물을 뽑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는 현명한 선택이 아닌, 최악의 결단을 내리고 말았다.
공치제라는 최고의 영예를 아들인 갈리에누스에게 부여한 것이다.
갈리에누스는 너무 젊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젊을뿐더러 소행이 불량스러웠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그가 주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은 어떤 관직에도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부자에 의한 공동 통치 7년(253~260)과 갈리에누스에 의한 단독 통치 8년(260~268)을 합한 15년 동안 로마는 끊임없는 혼란과 재앙에 휩싸였다.
샤푸르 왕의 아르메니아 정복
당시 페르시아는 아르다시르와 그의 아들 샤푸르가 구왕조를 타도하는 데 막 성공하고 있었다. 구왕조의 제후 가운데 살아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오직 아르메니아의 왕인 코스로에스뿐이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아르메니아라는 나라가 자연의 요새로 둘러싸여 난공불락이었고, 또 도망병과 불만분자가 잔뜩 모여 있었던 데다 로마와 동맹 관계를 체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이유는 코스로에스의 용기였다. 그는 30년간에 절친 항쟁을 이겨냈지만 그동안 한 번도 무력에 의해 굴복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도 마지막에는 신왕조(사산조 페르시아) 샤푸르 왕의 자객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주인을 잃은 아르메니아는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함락되었고 그후 27년간 페르시아에 의해 약탈과 유린을 당했다.
아르메니아를 수중에 넣고 기세등등해진 샤푸르 왕은 로마의 쇠퇴에 편승하여 유프라테스 강 앙쪽 도시를 모조리 파괴하고 약탈했다.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변경의 땅이라고는 하지만 유프라테스 강 주변은 야만족과 대치하기 위한 주요 거점지였다. 그런 곳을 모조리 빼앗기고 동맹국인 아르메니아까지도 페르시아의 속국이 된 것은 로마 제국에 위기감뿐만 아니라 참기 힘든 굴욕을 안겨주었다. 그리하여 발레리아누스는 직접 샤푸르 왕을 격퇴할 결심을 했다.
이때 황제는 마침 소아시아로 진군하는 중이었다. 고트족과의 전투가 일단락되었기 때문에 잠시 휴전하기 위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에데사(지금의 터키 우르파) 시로 향했다. 일행이 에데사 시 성벽 가까이 갔을 때 돌연 페르시아 군에게 포위당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에데사의 전투(260년)'이다.
그러나 이 전투 자체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불시에 공격당한 로마 군이 완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에데사의 전투'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일까? 그것은 이 전투에서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수인의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로마 황제, 수인이 되다
로마 제국사가 시작된 이래 가장 굴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에데사의 전투'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상세한 내막을 알 수가 없다. 그리 많지 않은 기록을 가지고 기번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굴욕적인 패인은 근위대장인 마크리아누스에게 있었다.
일찍이 아이밀리아누스 군 병사들로 인해 겁에 질린 발레리아누스의 정예부대는 마크리아누스의 잘못된 진언과 계획에 의해 전력이 약해져 있었다. 즉, 싸우기 전부터 페르시아 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로마 군은 몇 번이고 돌파를 시도했지만 그 즉시 격파당해 엄청난 시체만이 수북이 쌓였다.
압도적인 병력을 자랑하는 페르시아 군에 의해 사방이 둘러싸인 로마 군은 기아와 질병, 그리고 페르시아 군이 다시 습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페르시아 군은 공격해 오지 않았다. 샤푸르 왕은 로마 군이 스스로 붕괴되기를 천천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노린 대로 결국 로마 군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로마 군 내에는 패배가 모두 황제 탓이라는 이상한 말들이 나돌기 시작했고 장교들은 황제에게 즉시 항복하도록 강요했다. 그 압력에 밀려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발레리아누스는 본의 아니게 특사를 파견하여 안전한 퇴각을 보장해 준다면 황금을 내놓겠다는 제의를 샤푸르 왕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하던 샤푸르 왕은 그 제의를 일축해 버렸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전한 로마 군 특사를 구속하고 포위망을 좁혀서 황제와의 회견을 요구해 왔다.
이제 황제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거절하면 모두 살해될 위기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황제는 요구대로 샤푸르 왕과의 회견에 참석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황제는 즉시 페르시아 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대로마 제국의 황제가 타국의 군에 의해 체포된,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맞닥뜨린 로마 군 병사들의 동요는 상상을 초월했다.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그들은 그 자리에서 무기를 내동댕이쳤다.
대로마 제국의 황제에서 페르시아의 수인으로까지 지위가 강등된 발레리아누스의 모습은 실로 비참함 그 자체였다. 로마 황제를 상징하는 자의를 입은 채 쇠사슬에 묶여 페르시아 민중들 앞으로 끌려나와 조소의 대상이 되었고 샤푸르 왕이 말에 오를 때는 발판이 되어주기도 했다.
로마 제국이 재기했을 때 인질로 이용할 수 있도록 발레리아누스에게 그에 합당한 처우를 해주어야 한다고 샤푸르 왕에게 진언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왕은 그 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고 계속 그를 비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결국 발레리아누스는 굴욕을 견디다 못해 옥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샤푸르 왕은 죽은 그조차도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로마에 대한 전승 기념품으로 그의 시체에 짚을 채워넣어 페르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신전에 장식해 두었다고 전해진다.
듣기에도 끔찍한 이 이야기의 신빙성은 그리 높지 않다. 기번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해 전하고 있는 서간이 몇 통 있지만 그것은 모두 조작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상대가 증오스러운 로마 제국의 황제라 하더라도 시민들의 평판에 민감한 왕이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고는 믿기 힘들다."
이 만행의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발레리아누스가 로마 제국사에서 유일하게 적의 손에 붙잡혀 포로 신세로 죽어간 황제라는 사실이다.
꼭두각시 황제와 페르시아 군의 진격
'에데사의 전투'의 승리에 힘입어 샤푸르 왕은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후계자를 선택할 특권을 승인받았다. 그가 추대한 새 황제는 키리아데스라는 사람이었다. 키리아데스는 안티오키아 출신의 신분이 낮은 인물로서 악행의 극치를 달리던 끝에 로마에서 도망쳐온 망명자였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로마 군은 이런 인물이 황제가 되는 것을 몹시 꺼렸다. 그러나 이미 투항한 로마 군은 전승자인 샤푸르 왕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 꼭두각시 황제를 마지못해 환호했다.
키리아데스 황제는 샤푸르 왕의 꼭두각시였으므로 그가 한 일이라고는 로마 제국을 배신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샤푸르 왕을 위해 페르시아 군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안티오키아까지 갔다. 페르시아 군의 진격은 놀라우리만큼 빨랐고 게다가 잔혹하기까지 했다. 저명한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그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남겼다.
"그들의 진격은 로마 시민에게는 날벼락과도 같은 일이었다. 연극을 즐기는 등의 오락에 빠져 나태해진 시민들은 순식간에 습격을 받고 살해되거나 노예가 되었다. 금품은 약탈당했고 내부가 텅 비어버린 웅장한 건물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때 이 페르시아 군의 침공을 일시적으로 방어한 인물이 있었다. 그것은 에메사(지금의 시리아 힘스) 신전의 대신관이었다. 그는 대규모 동원 집단을 이끌고 투석기만으로 페르시아 군에 맞서 싸워 마침내 신전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 중의 예외적인 사건으로 다른 많은 도시들은 순식간에 약탈당하거나 파괴되고 말았다.
샤푸르 왕은 인구 40만이 사는 카파도키아의 수도 카이사레아(지금의 카이세리)로 진격했다. 그 군대를 맞아 싸운 것은 아테네 최대의 변론가 중 한 사람인 데모스테네스와 동성 관계를 맺고 있던 남자였다.
그의 태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고관도 아니었고 정식 명령을 받고 싸운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는 페르시아 군도 카이사레아를 함락시키는 데는 시간이 걸릴 만큼 그는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아니, 함락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칫 잘못했다가는 격퇴당할 뻔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의 배신으로 형세는 역전되어 카이사레아는 함락되었다.
그 인물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인데, 기번은 이 사건에 대해 "마지막에는 한 의사의 배신에 의해 함락되었다"라고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어서 유감스럽게도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데모스테네스를 생포하라."
샤푸르 왕은 전군에게 특별명령을 발했다. 발레리아누스에게 했던 것처럼 그 역시 능욕하려 했던 것일까. 그러나 그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데모스테네스는 카이사레아를 포위하고 있는 페르시아 군의 중앙을 돌파하여 탈출에 성공했다. 그후에 광분한 샤푸르 왕은 수천 명의 시민을 학살했다.
로마 제국을 구한 원로원 의원 오다이나투스
샤푸르 왕에게는 남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그 상태가 지속되었다면 로마 제국은 그에 의해 멸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그 이름은 오다이나투스였으며, 팔미라(지금의 시리아)에 살고 있는 시리아인 원로원 의원으로 대단한 거부였다.
어느 날 샤푸르 왕에게 대량의 공물이 전달되었다. 고가의 재물을 가득 실은 낙타의 대열이 끝없이 이어졌다. 샤푸르 왕은 그 재물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 웃음은 공물과 함께 첨부되어온 편지를 보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졌다.
유감스럽게도 그 편지에 어떤 내용이 쓰여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은 그 편지가 샤푸르 왕을 격노케 했다는 사실뿐이다.
"대왕인 나에게 이렇게 무례한 편지를 보내는 오다이나투스는 도대체 어떤 놈인가! 이 놈이 처벌의 경감을 바란다면 손을 뒤로 묶은 후에 내 발 밑에 엎드리게 할 것이다. 그것을 거부한다면 즉각 그 놈의 목을 쳐서 그 민족, 그 나라까지도 철저하게 파괴하리라!"
승전으로 인해 우쭐해진 샤푸르 왕은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이런 말을 던지고는 공물을 모두 유프라테스 강에 던져버렸다.
그후 오다이나투스가 취한 행동을 보면 그는 샤푸르 왕이 그 편지를 읽고 화를 낼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 같다.
"페르시아 군 침공!" 이 통지를 받은 오다이나투스는 즉시 마을 사람들과 사막의 유목민을 끌어 모아 즉석에서 군대를 편성하고 무적의 페르시아 군과 대치했다.
중과부적으로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해 보였다. 그러나 급조된 오다이나투스 군은 놀라운 힘을 발휘했다. 그들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우세한 페르시아 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그들을 괴롭혔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샤푸르 왕의 애첩 여러 명을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놀란 샤푸르 왕은 도망치듯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새 황제 갈리에누스는 기뻐하며 오다이나투스에게 '제국의 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 부분만 읽으면 샤푸르 왕이 대단히 야만스럽고 불손한 인물로 보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카이사레아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시민을 학살했고 그 사실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비난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아르메니아에서 관대한 면을 보이는 등 굳이 평가한다면 명군이며 영예로운 인물이었다. 그랬던 그가 왜 유독 로마에 대해서만 잔혹한 정복자의 얼굴을 내보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기번도 자세하게 쓰고 있지 않다. 여하튼 그에게 있어 로마 제국과 로마인은 중오의 대상이었다.
그후에도 로마 제국과 페르시아는 여러 차례 전쟁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7세기에 헤라클리우스(610~641 재위) 황제가 영토를 탈환하기까지 로마는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만신창이가 되었다. 로마 제국에게 있어서 페르시아는 계속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등장 객체
- 인물 — 갈루스, 갈리에누스, 기번, 데모스테네스, 마크리아누스, 발레리아누스, 샤푸르, 아르다시르, 아이밀리아누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오다이나투스, 코스로에스, 키리아데스, 헤라클리우스
- 지명 — 갈리아, 게르마니아, 곤디샤푸르, 니샤푸르, 로마 제국, 마르브, 바빌론, 발흐, 비샤푸르, 사산조 페르시아, 소아시아, 수사, 스폴레토, 시리아, 아르메니아, 아테네, 안티오키아, 에데사, 에메사, 에크바타나, 유프라테스 강, 카이사레아, 카파도키아, 크테시폰, 터키, 팔미라, 페르시아, 헤라트
- 사건 — 아르메니아 정복, 에데사의 전투, 연극
- 시대 — 사산조 페르시아
- 집단 — 고트족, 로마 군, 로마 시민, 사산조 페르시아, 원로원, 페르시아 군
이 포인트의 관계망
이 대목에 나온 관계 18건입니다. 점을 끌어 옮기고 휠로 확대할 수 있습니다.관계가 달린 것만 그립니다. 이름만 나온 인물·지명은 아래 목록에 있습니다.자주 묻는 것
다른 책입니다. 30포인트 편역본은 한국어 편역이고 원전은 기번의 영문입니다. 섞어 인용하면 사실관계가 어긋납니다. 인물·관계 자료는 편역본 계통에서만 뽑았습니다.
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입니다. 괄호를 내용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포인트 한 장이 약 1만 자, 5천 토큰입니다. 어느 AI 창에도 그냥 들어갑니다. 잘라 붙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있습니다. 포인트 01·02 본문 45건을 사료와 대조해 심각한 오류 6건을 찾았습니다. 전투 승패가 뒤집힌 서술이 두 장에 하나꼴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기준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