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 29

변모한 로마 제국

비잔틴 제국은 어떤 나라였는가
30포인트 편역본

제국의 생존을 지속한 헤라클리우스

이제 로마 제국에 남겨진 영토는 콘스탄티노플 성내를 제외하면 그리스이탈리아, 아프리카에 남은 몇몇 지역에 불과했다. 수도는 이집트를 잃은 이후에 기아와 역병으로 고통받았으며 저항의 수단도 구원의 희망도 없었다. — 기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잃어버린 제국의 서쪽 반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 제국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산조 페르시아, 서고트 왕국, 또 롬바르드 왕국의 침공으로 제국은 다시 한번 에스파냐 남서부와 이탈리아 반도를 빼앗겼다.
특히 이탈리아 본토를 잃은 것은 제국의 신민들에게는 커다란 중격이었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뒤를 이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미쳐버렸다고 한다.
게다가 제국 내에는 역병이 만연했고 시민들은 기아로 고통받고 있었다. 가장 화려한 영화를 누리던 제국이 이렇게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황제들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위기는 더해갈 뿐이었다.
이 위기를 구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 신화의 영웅인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딴 아프리카의 총독 헤라클리우스(610~641 재위) 1세였다. 당시 제위에 있었던 사람은 마우리키우스 황제를 암살하고 제위에 오른 백인대장 포카스(602~610 재위)였다. 그는 반항하는 귀족층을 재산 몰수와 처형으로 다뤘기 때문에 제국의 내부는 내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또다시 페르시아의 침공이 시작되어 로마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그때 원로원의 한 의원이 은밀하게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있던 헤라클리우스에게 밀사를 보내 포카스 황제를 토벌하도록 요청했다.
헤라클리우스는 포카스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순식간에 이집트를 제압했다. 또 아들 헤라클리우스(아버지와 동명)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포카스 황제는 그의 약혼자와 어머니를 인질로 잡고 투항을 명령했지만 헤라클리우스는 그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
헤라클리우스 군은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망명자, 도망자와 합류하여 불과 이틀 만에 수도를 제압하고 약혼자와 어머니를 구출했다.
포카스 황제는 궁전에서 체포되어 왕관과 용포를 빼앗기고 쇠사슬에 묶여 헤라클리우스 앞으로 끌려 나갔다.
"네가 나보다 더 훌륭하게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포카스 황제의 마지막 말이었다. 수많은 고문 끝에 그의 몸은 몸통부터 잘려 나갔고, 잘게 토막 내어져 불 속에 던져졌다.
황제가 된 헤라클리우스는 붕괴 직전에 놓인 제국을 재건하는 일부터 착수했다. 먼저 제국의 곡물 창고였던 이집트를 빼앗긴 것을 이유로 들어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어 오던 무료 밀 배급을 폐지했다. 또 서민의 오락으로 인기가 높았던 마차 행사를 1년에 몇 차례만 개최하도록 제한했다. 로마 사회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였던 '빵과 서커스'는 이때 종말을 맞았다.
다음으로 황제는 제국이 행하고 있는 전쟁이 성 십자가를 되찾기 위한 성전이라고 주장하면서 제국 전역의 교회로부터 전쟁 비용을 거둬들였다. 참고로 이때 주조된 은화에는 라틴어로 "신은 로마인을 구원해 주신다", 동화에는 그리스어로 "이 표시와 더불어 승리하리라"라는 글이 각인되어 있었다. 이 두 문장은 로마 제국이 로마와 비잔틴의 공집합이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황제는 이렇게 획득한 전비로 붕괴 상태에 있던 군대를 재편했다. 그후 그는 페르시아 대원정을 시도했고 점령당한 동부의 속주를 모두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스인으로 변모해 간 로마 시민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행한 개혁은 모두 성공을 거뒀다. 덕분에 존폐 위기에 놓여 있던 로마 제국은 이후에 이른바 동로마 제국으로서 900년 가까이 더 지속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혁신했다는 것은 구로마 제국과의 결별을 의미했다. 따라서 헤라클리우스 황제 치세 이후에 로마 제국은 주로 비잔틴 제국으로 불렸다. 다만 이것은 정식 국명이 아니며 정확하게 언제부터 로마 제국을 비잔틴 제국으로 불러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비잔틴 제국이란 4세기의 콘스탄티노플 건설부터 1453년 멸망하기까지의 동로마 제국을 가리키며, '유럽적이지도 아프리카적이지도 아시아적이지도 않은 정치·문화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이 동로마의 특수성이며 가령 오늘날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서유럽 사람들에게 이 '비잔틴'이라는 말은 그다지 좋은 이미지로 남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교활한 성격이나 번잡스러운 일을 일컬을 때 '비잔틴 같다'라는 표현을 쓴다. 어쩌면 이것이 동로마 제국민들이 '비잔틴'이라는 말을 싫어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동로마 제국민들은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자신들의 나라를 계속 '로마 제국'이라고 불렀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 시기의 제국은 그 옛날의 로마 제국을 이어가면서도 다르게 변해 있었다.
로마 제국의 중심은 그리스에서 동방의 아시아로 옮겨갔고 영원의 도시 로마는 이미 동고트족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며 동로마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제국의 중심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옮겨간 사실에 위화감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의 문화·문명의 수준은 동고서저였다. 이러한 지리적 이유로 인해 많은 동로마 제국민들이 그리스인으로 변해 갔다. 그러나 그들은 "이 나라는 유일정통의 로마 제국이며 자신들은 로마인이다"라고 천년에 걸쳐 계속 주장해 왔다.
황제는 권력을 더욱 확대해 나갔고 공화국 원수에서 전제군주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로마 황제는 최고의 권한을 신으로부터 위탁받고 있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국교로서 기독교의 지위는 더욱 확고해졌고 그때까지 인정되었던 이혼이 원칙적으로 금지되는 등 법률과 생활 면에서도 기독교의 영향력이 커지게 되었다.
게다가 이전과는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 제국의 공용어였던 라틴어는 7세기 이후 궁정에서도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그리스어가 사용되었다.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의 시대적 경계가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여하튼 이 나라는 최고의 영화를 구가했던 로마 제국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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