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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된 황비

황비 테오도라의 공과는 무엇인가
30포인트 편역본
황제 자리에 오른 유스티니아누스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놀랍게도 그가 사랑하는 여인, 그 이름도 유명한 테오도라와 황제의 지위를 나누어 가진 것이었다. 기번

사육사의 딸로 태어난 테오도라

라벤나이탈리아 중북부에 있는 로마나 에밀리아 주의 현도이다. 아드리아해로부터 약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고대 로마 시대에는 해안을 따라 로마로 이어지는 군사적 요지였다. 기원전 49년에 폼페이우스와의 대항을 결의한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원로원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라벤나 근처를 흐르고 있던 루비콘 강을 건넜다. 그리고 410년에는 이곳이 밀라노 대신 서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이곳은 모자이크 예술의 거리로도 유명하다. 특히 6세기에 세워진 산비탈레 성당에 있는 모자이크화는 비잔틴 미술의 집대성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한층 눈길을 끄는 작품이 테오도라 황비상이다. 여관과 시종을 거느린 테오도라가 성배를 내밀고 있는 이 모자이크화는 균형미가 뛰어난 작품이다. 테오도라의 머리 장식과 목걸이, 귀걸이 등은 아름다운 색채로 표현되어 있고 특히 그녀가 걸치고 있는 망토는 무척 고급스러운 자주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로마사의 전면에 등장한 여성으로서 카이사르를 유혹한 클레오파트라가 가장 유명하지만 이 모자이크화에 그려진 테오도라 역시 로마 제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클레오파트라와는 전혀 다른 여성이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처음부터 여왕의 운명을 타고난 것에 반해 테오도라는 콘스탄티노플 대경기장의 동물 사육사의 차녀로 태어났다. 그렇게 낮은 신분의 여성이 황비에까지 오른 것을 보면 로마 제국의 깊은 포용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시대는 아나스타시우스 황제의 치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경기장에서 기르는 맹수를 사육하는 일은 키프로스 섬 출신의 아카키우스라는 남자에게 맡겨졌다. 그에게는 테오도라를 포함해서 딸이 셋 있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곰의 남편'이라 불릴 만큼 친근감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그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죽자 남겨진 테오도라의 어머니는 사육사 일을 얻어내기 위해 서둘러 재혼하고 기다렸다.
그러나 그 일은 다른 남자에게 넘어가버렸다.
기대하던 일자리를 잃은 어머니는 고민 끝에 초라한 행색의 세 딸을 경기장 무대 위에 세웠다. 그때 서로 싸우던 두 개 당파 중 녹파는 경멸의 눈초리로 그녀들을 바라보았으나 청파는 깊은 동정심을 나타냈다.
두 당이 이때 보인 대조적인 반응은 테오도라의 마음속 깊이 각인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녀가 황비가 되었을 때 국정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통의 나날 속에서 떠오른 환영

세 자매는 아름다움이 날로 더해져 마침내 마을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중에서도 테오도라의 아름다움은 더욱 돋보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림이나 노래로도 표현되었다.
테오도라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스트리퍼였다. 돈만 주면 누구와도 동침하는 창녀였던 것이다. 최악의 경우, 그녀와 하룻밤을 지내기로 약속했다 해도 그 남자보다 더 강하고 유복한 상대가 나타나면 침대에서 곧바로 쫓겨나기 일쑤였다. 따라서 스캔들을 두려워하는 남자들은 길모퉁이에서 그녀와 부딪히면 외면하곤 했다고 한다.
그후 테오도라는 어떤 군 사령관의 애인이 되어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러나 사령관은 그녀의 헤픈 씀씀이와 불성실함에 질려버린 나머지 그녀를 내쫓아버렸다. 사령관으로부터 쫓겨난 그녀는 각지를 떠돌며 몸을 팔아 겨우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인생 최악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테오도라 앞에 어느 날 갑자기 한 생령이 나타나 "당신은 마침내 강력한 군주의 배우자가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그 예언을 굳게 믿고 있던 테오도라는 그때까지의 난잡한 생활을 회개하고 정리한 뒤 작은 집을 빌려서 양모 실을 잣아 번 적은 돈으로 청빈한 생활을 시작했다.
참고로 이때 테오도라가 살았던 집은 후에 웅장한 사원으로 탈바꿈했다.

테오도라를 얻기 위해 법률까지 바꾼 황제

우연인지 책략인지 알 수 없지만 사실이야 어떻든 간에 테오도라의 아름다움이 당시 백부 밑에서 원로원 의원으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쥐고 있던 유스티니아누스의 눈에 띄었다. 그는 테오도라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다.
사실 이때 유스티니아누스는 종교상의 이유로 금욕 생활을 하고 있었다. 테오도라는 그가 필사적으로 억누르려 했던 욕망을 역공격하여 유혹했고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남자 경험이 풍부한 그녀에게 그것은 무엇보다 쉬운 일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동방의 전쟁에서 얻은 금은보화를 그녀에게 아낌없이 주었고 마침내 그녀를 정실로 맞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 간단한 일만은 아니었다.
당시 로마에는 원로원 의원과 신분이 낮은 여성 혹은 화류계(예능계통)에 종사하는 여성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이 있었다. 특히 황비 루피키나는 그녀와의 결혼을 노골적으로 반대했고, 유스티니아누스의 친어머니도 테오도라의 아름다움이나 명석함은 인정했지만 그녀의 오만함이나 단정치 못한 몸가짐이 아들을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에서 사랑의 도피 행각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또 잔혹한 사람이었다면 반대하는 백모와 친어머니를 살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는 달랐다. 그는 오로지 황비가 죽기만을 무작정 기다렸다.
"기회는 반드시 기다리는 자의 편이다"라는 말대로 결국 황비가 죽자 유스티니아누스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유스티누스 황제의 이름으로 예로부터 내려오던 엄격한 규칙을 정정하고 새 법률을 공포했다.
이에 따라 극장에서 나체쇼를 하거나 몸을 팔던 여성들에게 '영광스러운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다. 즉 과거의 행적을 뉘우치고 참회하면 로마 제국의 고관과 정식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이 법률이 발포되자마자 곧바로 식을 거행했고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라를 정실로 맞아들였다. 마침내 유스티니아누스가 황제가 되자 그는 테오도라를 자신과 대등한 제국의 공치제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무수한 관객들 앞에서 나체를 선보였던 창녀는 예언대로 로마 제국의 여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를 '타락한 여자',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고 비난하는 사람은 여전히 있었다. 테오도라는 그런 비난의 목소리와 질시의 눈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1년의 대부분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지어준 해안가의 이궁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테오도라는 자신의 미모를 관리하면서 입욕과 미식을 즐겼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테오도라를 고관들이 그냥 둘 리 없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테오도라를 방문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둡고 후텁지근한 대기실에서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겨우 알현하는 등 푸대접을 받았다. 그중에는 테오도라의 발에 입맞춤을 강요받은 고관도 있었다고 한다. 적어도 이것은 그때까지 테오도라가 그들로부터 받아온 처사에 대한 보복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녀는 돈에 대한 집착이 무서울 정도로 강했다. 로마 제국의 반을 손에 넣은 것만으로도 만족하지 않았다. 기번은 이런 그녀의 성품에 대해 "어마어마한 금은보화를 축적하려는 그녀의 지칠 줄 모르는 탐욕은 아마도 남편이 죽으면 자신 역시 파멸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호의적인 해석을 내놓고 있다.
그러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황제가 병으로 쓰러졌을 때는 수도의 의향에 따르고 싶지 않다'라고 무심코 말해버린 두 장군 때문이었을까. 여하튼 테오도라는 반목하는 사람들에게 도저히 여자의 행위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잔인한 짓을 자행했다.
그녀가 풀어놓은 무수한 스파이들은 사람들의 수상쩍은 행동이나 말, 눈초리까지도 모조리 그녀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고발당한 자는 그녀의 개인 감옥에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다.
어둡고 더러운 지하 감옥에서 죽어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운 좋게 석방된 사람도 손발을 잃거나 재산을 몰수당하고 심지어 정신 이상을 겪기도 했다. 게다가 그녀의 증오는 그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에게까지 향해 있었다.
사형이나 유형이 선고된 사람 중에는 원로원 의원과 주교도 있었다. 여왕의 명령을 거부한 형리도 적지 않았지만 테오도라는 그들을 위협하여 형 집행을 촉구했다.

테오도라의 공과

그런 잔인한 테오도라는 한편으로 각종 자선사업을 활발하게 베풀었다. 나약한 여성에게 특히 헌신적이었는데, 그것은 어쩌면 과거에 매춘부로까지 전락해야만 했던 자신과 자매들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보스포루스 해협아시아 측에 있던 궁전을 넓고 멋진 수도원으로 개축하여 콘스탄티노플의 거리와 창녀촌에서 데려온 500명이나 되는 여성들의 갱생 시설로 사용했다. 또한 그녀는 병원이나 구빈 시설 등도 자비를 들여 건축했다.
테오도라는 외모가 아름다웠을 뿐 아니라 총명하기까지 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녀를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까지 여기고 있었다. 그가 포고한 법률 중 대부분은 테오도라의 조언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녀의 용기 또한 대단했는데,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니카의 반란'에서 유스티니아누스를 고무했던 일에서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테오도라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라면 놀랄 일이겠지만 그녀는 정숙한 여성으로 변모해 있었다.
"그녀가 유스티니아누스와 결혼하는 순간부터 정절을 지켰다고 하는 것은 그녀의 적이 침묵하고 있는 사실이 뒷받침해 준다. 그것은 그녀가 젊은 시절 난잡한 애정 행각에 대한 참회의 의미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황비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있었을 것이다. 이유야 어떻든 그녀의 변신은 감복할 만하다"고 기번은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을 손에 넣은 것처럼 보이는 테오도라였지만 '아들을 갖고 싶다'는 소원은 이루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힘들게 얻은 외동딸도 어릴 때 잃고 말았다.
자식에 대해 불행한 일을 겪는 동안에도 유스티니아누스의 애정은 식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권위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가끔 두 사람이 말다툼을 벌이는 모습을 목격한 가신이 두 사람의 불화로 착각하여 이를 이용하려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자는 예외 없이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폭동을 피해 도망치려 한 유스티니아누스를 독려하며 반목하는 자들에게 가차없이 엄벌을 내리는 모습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 테오도라는 병약한 여인이었다. 아마도 젊은 시절 방탕했던 생활의 여파인지는 모르겠지만 만년에는 몸이 더욱 쇠약해졌다. 의사는 그녀에게 그리스 델피에 있는 온천에서 요양할 것을 권했다.
이 여행에서 근위장관, 회계장관, 여러 명의 친위병과 명예 현관 등 시종 4천여 명이 여왕을 수행했다. 테오도라 일행이 다니는 길은 깨끗하게 수복되었고 도착하는 곳마다 숙박용 이궁이 세워졌다.
그녀는 중간에 들르는 교회와 수도원, 병원에 거액을 기부하면서 자신의 건강 회복을 위해 신에게 기원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그 많은 기도들도 헛되이 테오도라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결혼한 지 24년째 되는 해에 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로 일컬어지는 유스티니아누스였지만 테오도라가 없었다면 '니카의 반란' 때 도주하여 결국 '겁쟁이 황제'라는 오명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테오도라에게는 반목하는 자를 학살한 죄가 있지만 그것은 그녀가 황제와 제국에 기여한 '공'에 비하면 미약한 것이다. 그녀의 죽음 소식을 듣고 유스티니아누스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고 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아내를 잃은 것뿐 아니라 유능한 공치제를 잃은 슬픔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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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기준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