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 23

급속도로 취약해진 로마의 군사력

30포인트 편역본
고트족과의 전쟁에서 약간의 전과를 올린 발렌스 황제는 자신의 영토인 아시아 시찰에 나선 후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에 안착했다. 이곳에서는 페르시아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한편 야만족의 약탈을 저지하고 아리우스파에 반대하는 자들을 무차별 처형했다.

훈족을 피해 남하한 고트족

고트족을 비롯한 게르만 민족은 기원전 1000년경부터 발트해 연안에 거주하고 있었고 원주민인 켈트족을 압박하면서 기원 원년경에는 라인 강에서 도나우 강의 북안 일대까지 진출하여 로마 제국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 시기부터 로마는 계속 고트족의 침략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토록 용맹무쌍하기로 유명한 고트족도 두려워하는 민족이 있었으니 바로 훈족이었다.
훈족은 기원전 3세기부터 약 500년간에 걸쳐 중앙아시아의 키르키스 고원에서 번성한 아시아계 유목 기마민족으로 중국에서 '흉노'라 불린 부족국가의 일부로 추측된다.
진의 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은 이유 중의 하나는 이 '흉노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기원전 200년에 한의 고조(유방)는 군을 이끌고 흉노족에 도전했지만 거꾸로 302만이나 되는 기병에 의해 7일간 포위되었다가 탈출하여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장안(지금의 시안)으로 도망쳐 왔다. 고조는 흉노족에게 농산물을 보내고 혼인관계를 맺는 조건으로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려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고 고조가 죽고 나서 고후해에 의해 비로소 화친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흉노족은 종종 한나라를 침략했다.
기원전 60년경에는 흉노족 내부에서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 중국으로 남하한 남흉노와 몽골에 그대로 남은 북흉노로 분열되었다.
남흉노족은 서서히 한족에게 융화되어갔고, 후한의 원정군에게 쫓기던 북흉노족은 어느 날 중국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유럽에 훈족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정황을 근거로 '훈족=흉노족(북흉노족의 후예)'으로 추정하게 된 것이다. 그 밖에도 훈족은 흉노족이 사용하던 투르크어를 사용했고 소그드 상인이 흉노를 '훈'으로 불렀다는 사실도 이 추측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훈족은 1세기 중반까지 볼가 강 유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어떤 계기로 인해 4세기 후반에는 카스피해의 북쪽을 서진하여 흑해 북안에 있던 동고트족을 마치 갓난 아기 손목 비틀듯이 쉽게 물리쳤다(375년). 또 훈족은 계속 이동하면서 서고트족의 거주지까지 접근했고, 그 사실을 알고 다급해진 서고트족은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의 시작이었다. 이때 서고트족은 가족과 전 재산을 마차에 싣고 가축 무리들을 이끌고 남하했는데, 말 그대로 대이동이었다고 한다.
=="훈족이라는 무시무시한 야만족을 피해 서고트족이 남하해 왔습니다. 도나우 강 연안 수십 킬로미터에 걸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로마의 보호를 요청해 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발렌스 황제는 도나우 지방의 방위 담당자로부터 전달된 이 급보를 받아들고 전율했다. 건너편 기슭에 죽 늘어선 서고트족 사람들은 저마다 손을 흔들며 비통한 목소리로 절박하게 위기를 호소하며 로마 제국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고트족의 사절은 "만약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준다면 트라키아의 황무지를 경작하고 로마법에 따라 제국 방위에 힘쓰겠다"고 맹세했다.

도나우 강을 건넌 백만 명의 서고트족

사태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발렌스 황제는 결단력이 부족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단어는 무의미하겠지만, 이때 서방의 황제였던 그의 친형 발렌티니아누스 황제가 살아 있었다면 그에게 적절한 충고를 해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황제가 그때까지 의지해 온 발렌티니아누스 황제는 그 한 해 전에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일부 사람들이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도나우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건너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로마 군 병사가 쏜 화살을 맞고 그들은 죽어갔다.
사실 이때 장교들이 보여준 대응은 한결같지 않았다. 서고트족의 안쓰러운 모습을 지켜보며 차마 화살을 당기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강을 건너오는 이들을 구해 준 장교도 있었다. 한편 황제의 명령에 따라 서고트족의 도하를 저지했는데도 나중에 처벌을 받은 장교도 있었다고 한다.
=="서고트족 전원을 받아들이노라. 강을 건너도록 허락하노라."==
마침내 황제의 칙령이 내려지고 현장에 있던 병사들은 조속히 행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연일 내리는 비로 인해 크게 불어난 도나우 강의 폭이 1.6킬로미터를 넘어서는 바람에 강을 건너기가 매우 어려웠다. 군선에서 카누까지 온갖 종류의 배가 동원되었고 초인적인 노력으로 연일 밤낮을 왕복했지만 그래도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급류에 휩쓸려 익사했다.
이때 도나우 강을 건넌 서고트족의 숫자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물론 로마 제국은 정확한 숫자를 파악해 놓을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아 그 수를 세던 담당자가 질려버린 나머지 도중에 포기하고 말았다. 기번은 다음과 같이 추측하고 있다.
"신빙성 있는 문헌에 따르면 서고트족 전사의 수는 2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또 그들이 동반한 처자, 노예의 수를 더하면 이때 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의 영토에 당도한 숫자는 틀림없이 남녀노소를 모두 합해서 백만 명에 달했을 것이다."
백만 명이라면 실로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말에 걸맞은 숫자이다.
서고트족은 간신히 훈족의 위협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안도의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로마로부터 굴욕적인 대우를 받게 되었다.
먼저 그들에게는 강을 건너게 해준 대신 무기를 맡기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용맹무쌍함으로 유명한 서고트족 병사들에게 있어서 무기는 명예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무기를 맡기라는 것은 그 명예를 맡기라는 것과 같이 굴욕적인 것이었다. 그 명령을 철회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아내와 소년소녀들을 로마 군 장교에게 보냈다.
그들에게 내려진 다음 명령은 아이들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곧 아시아의 속주로 보내져 그곳에 살면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는 인질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두 가지 조치는 영원한 숙적을 구출한 로마로서는 당연한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서고트족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것도 분명했다.

이민족을 수용하지 못한 로마의 실책

얼마 후에 건너편에 있는 동고트족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서고트족과 같은 조건으로 보호해 주기 바란다'는 요청을 해왔다. 그런데 서고트족에게는 도하를 허용했던 발렌스 황제가 웬일인지 동고트족의 요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로 인해 한참 후에 뜻하지 않은 사태가 일어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말이다.
강을 건너 로마의 보호 아래 들어온 서고트족에게 안락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운이 나빴던 것은 이 지역의 사령관이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적당한 거주지가 마련될 때까지 그들에게 식량과 주거지를 제공한다"는 칙령을 완전히 무시하고 서고트족에게 믿기 힘들 만큼 형편없는 식사를 터무니없는 가격에 팔았다. 그들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고기는 개고기나 누구도 손 대기를 꺼리는 병사한 동물들의 고기뿐이었다. 그런 끔찍한 음식도 돈을 내고 사먹어야 했다. 빵 500그램을 사기 위해 유능한 노예 한 사람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터무니없는 가격이라 해도 식량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두꺼운 카펫이나 멋진 옷가지들은 모두 식량과 교환했고 결국에는 여자들까지 팔려갔다.
그들은 참을성 있게 자신들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음을 호소했지만 그 말이 황제의 귀에까지 전달되지는 못했다. 주변에는 비옥한 땅이 펼쳐져 있었고 손 닿는 곳에는 풍부한 물자와 재물이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신들만 그토록 고통을 당해야 하는 이유를 모른 채 불평불만을 터트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들에게는 무기가 남아 있었고, 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사령관은 서둘러 그들을 각지로 분산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들을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병력이 필요했다. 두 사령관은 도나우 강의 방위에 투입되어 있던 병력을 그곳으로 배치했다. 그들은 서고트족이 이곳에 머물고 있는 한 도나우 강의 방위 병력이 줄어들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순간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복병이 건너편 초원에 숨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말이다.
이 치명적인 로마 측의 방심을 훈족의 추격으로부터 도망칠 기회만 엿보고 있던 동고트족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들은 배를 끌어 모아 무난히 로마 영토로 건너갔다. 그리고 동고트족은 로마 제국의 영토 내에 독립된 진영을 구축했다.
서고트족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들은 은밀하게 동고트족과 공동 투쟁의 밀약을 맺으면서 겉으로는 로마에 충성을 맹세하고 도나우 강으로부터 약 1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하이모이시아 속주의 고도 마르키아노폴리스를 향해 이동했다.
마르키아노폴리스에서도 서고트족에 대한 처우는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들은 처우 개선을 거듭 요구했으나 로마 측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조소뿐이었다. 마침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서고트족은 칼을 뽑아들었다.
서고트족이 부하들을 살해하고 무기까지 빼앗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령관은 병사들을 모아서 서고트족을 토벌하러 떠났다. 그러나 한발 앞서서 마르키아노폴리스를 탈출한 서고트족은 동고트족과 합류해서 로마 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마인의 잔혹한 처사에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고트족과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만 급급했던 사령관이 이끄는 로마 군과의 전투는 이미 시작되기 전부터 불을 보듯 뻔했다.
용맹무쌍한 고트족은 숫자상으로 훨씬 웃도는 로마 군을 통쾌하게 격파하고 로마 군 사령관은 전쟁터에서 도주했다.
역사가 요르다네스는 이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승리로 인해 야만족의 처참한 생활과 로마인의 안전은 종말을 맞고 말았다. 이날을 기점으로 고트족은 유랑자라는 불안정한 처지에서 벗어나 지주에 대해 절대적인 지배권을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는 도나우 강을 경계로 하여 로마 제국 북부 속주를 점령하게 되었다."
모든 잘못은 고트족을 냉대한 악덕 사령관에게 있었으나 그 대가를 치른 것은 마르키아노폴리스 주변의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광분에 떠는 고트족의 손에 잔혹하게 살해당했으며 집들은 모두 불타버렸다. 게다가 살아남은 자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로마 군, 고트족에게 패하다." 발렌스 황제에게 이 소식이 전해진 것은 그가 콘스탄티노플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그는 즉시 고트족 토벌에 나섰다. 우유부단함으로 일관하던 발렌스 황제가 이때만큼은 곧바로 결단을 내렸는데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서방의 황제로 즉위한 그라티아누스(367~383 재위)가 전 신민표로의 칭찬을 한 몸에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대로 고트족을 방치해 둘 수 없다는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발렌스 황제는 몹시 초조했다. 그는 그라티아누스 황제에 비견되는 명예를 얻고 싶은 것은 물론이고 신민들의 존경을 받고 싶었다.
황제의 특별 명령을 받은 세바스티아누스 장군은 각 군대로부터 300명씩 병사를 차출하여 별동대를 편성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기 다루는 방법을 철저하게 주입시켜서 고트족의 진영을 급습했다. 이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전리품으로 빼앗겼던 엄청난 양의 무기와 금품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때의 성공이 오히려 황제의 욕심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재집결되고 있던 고트족의 세력을 과소평가한 그는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물론 이에 대해 신중을 기하라고 충언하는 신하도 있었다. 그리고 앞선 작전을 성공시킨 세바스티아누스 장군도 고트족과의 전투에 어려움이 있음을 설명했다. 그러나 황제는 장군을 칭찬했을 뿐 그의 충고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리코메레스 장군 역시 이렇게 말했다.
"서방의 황제 그라티아누스가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떠났습니다. 고트전의 승리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서라도 잠시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발렌스 황제는 그라티아누스 황제의 도움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다. 자기 혼자 힘으로 영광을 차지하여 시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더 다급해진 발렌스 황제는 병사를 진격시키기로 결심했다.

전력 약화를 드러낸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로마 제국의 오랜 역사에서 378년 8월 9일은 분명 최악의 날이었다. 이날 발렌스 황제는 하드리아노폴리스(아드리아노플, 지금의 터키에 있는 에디르네)에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집합해 있던 고트족을 공격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로마 군은 숫자상으로는 고트족을 완전히 압도했다. 승리는 당연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로마 군의 대형이 흐트러지면서 모든 전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기병부대의 오른쪽 날개가 적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까지 왔을 때 왼쪽 날개는 아직 한참 뒤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무전이나 휴대전화 같은 통신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한번 흐트러지기 시작한 대형을 원상태로 되돌리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그날은 아침부터 기온이 높아 갑옷과 방패로 몸을 무장한 로마 군 병사는 전장에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전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체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사실 고트족을 격파하기에 이때만큼 절호의 시기는 없었다. 고트족의 기병부대가 식량 조달을 위해 본영을 이탈해 있었기 때문이다.
대열이 흐트러지고 체력을 소모한 로마 군과 기병부대가 없는 고트족. 이 두 군대는 서로 결정적인 전력을 잃은 채로 폭염 아래서 계속 서로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고트족이 화의를 신청한 것은 이때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 끌기 작전이었다. 고트족은 오랫동안 강한 햇볕에 노출되어 있던 로마 군이 기아와 갈증으로 지쳐 떨어질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던 발렌스 황제는 고트족 진영으로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곧장 되돌아왔다. 바쿠리우스라는 이베리아인 지휘관이 자신의 판단으로 이미 공격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공격을 고트족이 순식간에 물리치는 바람에 로마 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때마침 운이 나쁘게도 고트족의 기병부대가 돌아와 공격해 왔다. 적을 포위하고 사방에서 공격하여 섬멸시키려던 발렌스 황제의 계획을 공교롭게도 고트족이 실현했다.
사방으로부터 갑작스레 공격을 당하기 시작한 로마 군의 기병대는 놀라움과 공포에 질린 나머지 도망치기 시작했다. 남겨진 보병부대는 고트족에게 철저하게 격파당했다.
황제조차도 앞을 다투어 도망친 근위병들에게 버려졌으며 적이 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이때 로마 군 측에 남아 있었던 것은 2개 소대뿐이었다. 황제는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달려온 병사들에 의해 전장 근처의 농가로 옮겨져 그곳에서 상처를 치료받았다. 그러나 곧바로 발각되어 포위당하고 말았다.
전투에서 적의 수령을 생포하는 것만큼 큰 무공은 없는 법이다. 고트족 병사는 황제를 생포하기 위해 농가로 바짝 다가갔다. 그때 몰래 농가 지붕 위에 올라간 병사가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이에 격분한 고트족은 공을 세우는 일 따위는 잊어버리고 오두막 주변에 쌓여 있던 짚더미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순식간에 이 초라한 오두막을 전부 불태워버렸다. 그때 다행히 창문을 통해 도망쳤던 한 젊은 병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 로마 군은 황제가 불타 죽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소식은 고트족에게도 전해졌다. 로마 군은 황제를 잃었고 고트족은 다시없는 전과를 놓쳤다.
이 전투에서 로마 군은 기병부대와 보병부대의 총사령관 2명, 궁정의 대관 2명, 사령관 35명을 잃었다. 세바스티아누스 장군도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로마는 군의 3분의 1을 '대수롭지 않은' 야만족과의 전투에서 잃은 것이다. 남은 자들은 야반도주로 목숨만 간신히 건져서 돌아왔다. 잃어버린 병사의 숫자로 비교한다면 한니발의 전투와 거의 비슷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에 끼친 영향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로마 군이 더 이상 무적의 군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변의 야만족에게 가르쳐준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이 전투로 다른 야만족의 침략이 촉발되었다. 406년에는 반달족, 수에비족, 알라니족 연합군이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를 침공했다. 그로부터 3년 후에는 에스파냐까지도 점령당했다. 나아가 브리타니아에서는 콘스탄티우스를 사칭하는 게르만인이 황제를 참칭하고 브리타니아에 주둔해 있던 로마 군을 내쫓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미 힘을 잃고 있던 서로마 제국은 아무런 수단도 강구할 수가 없었다.==
황제와 두 사령관, 그리고 현장의 병사가 로마 초기의 초심을 잃지 않고 서고트족의 대이동을 잘 처리하여 그들을 로마 제국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이고 인적 자원으로 활용했다면 잇달아 침입해 온 야만족에 의해 그처럼 고전을 치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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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입니다. 괄호를 내용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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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기준일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