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 28
이슬람 세력의 확산
이슬람교는 어떻게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는가30포인트 편역본
마흔 살에 알라의 계시를 받은 마호메트
황폐화되고 쇠퇴한 것은 산업과 인구뿐만이 아니었다. 로마 제국의 지식과 서적도 절멸한 직전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는 책을 읽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겨우 성직자만이 성서를 이해하고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 책을 읽을 뿐이었다. 읽히지 않게 된 대부분의 책들은 정작 대신 불태워졌다.
아바스 왕조바그다드를 수도로 한 이슬람 왕조로 '지혜의 관'이라 불리는 학술기관을 창설했다.
로마 제국이 최고로 번성했을 때 로마 시내에도 공중목욕탕이 여러 개 있었다. 당시에도 공중목욕탕의 물을 데우기 위해, 또는 욕탕을 유지하기 위해 대량의 기름이 필요했다. 로마 제국이 최전성기를 구가할 때 로마 시만 해도 연간 2천 톤 이상의 기름이 소비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공중목욕탕이 1만 개가 넘었던 바그다드에도 엄청난 양의 연료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 연료는 여러 나라에서 유입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은 어떻게 그처럼 짧은 기간 내에 번영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마호메트는 아랍 제일의 명문 하심가 출신이었다. 그의 증조부인 하심은 메카에 기근이 덮쳤을 때 자신의 재산을 분배하여 시민들을 구제했다. 또 조부인 아브드 알 무탈리브는 메카가 예멘 왕국의 병사들에게 포위되자 엉뚱하게도 가축들의 반환을 요구했다. 이에 놀란 사령관이 그에게 물었다.
"너희들의 신전이 파괴되려 하는데 왜 도움을 요청하지 않느냐?"
"가축은 우리들의 것이지만 카바 신전은 신들의 것이다. 신전을 파괴하려 한다면 신들이 그것을 저지할 것이다."
그런 후에 예멘 군은 갑자기 새들의 무리로부터 돌 세례를 받는 바람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호메트는 그러한 유서 깊은 가문의 아들로서 570년 메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나기 직전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까지 어린 시절에 잃었다. 그러나 친척이 많았기 때문에 유산으로 그에게 남겨진 것은 겨우 낙타 다섯 마리와 하인 한 명뿐이었다. 그런 마호메트를 곁에서 항상 보살펴주고 키워준 것은 친척 중에서도 가장 세력가였던 백부 아브 탈리브였다.
스물다섯 살에 그는 메카의 귀부인 하디자 밑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당시 미망인이었던 그녀는 결국 마호메트와 결혼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신랑 측에서 금 340그램과 낙타 20마리를 신부 측에 보냈다고 한다. 이것을 준비해 준 것은 물론 선심 좋은 백부였다.
하디자와 결혼하여 유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 마호메트였으나 그는 오히려 빈부의 격차와 그들이 행하던 우상숭배로 인해 번뇌했고, 결국 메카 교외의 히라 산에 있는 동굴에 칩거하여 명상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흔 살이 되던 해에 그는 '일어나 경고하라'라는 알라의 계시를 받기에 이르렀다. 계시는 23년간이나 계속되었고 마침내 그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각하고 사람들에게 유일신 알라에게 귀의하라고 설파했다.
"알라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마호메트의 이러한 가르침은 당시 메카를 지배하고 있던 대부호들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특권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한 그들은 마호메트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히즈라마호메트가 박해를 피해 소수의 신자들과 함께 메카를 탈출하여 메디나로 도망간 사건으로 이슬람력의 기원이 되었다.
그가 메카에서 추방된 후에도 이슬람 신자들은 날로 늘어갔으며 그들은 주변의 부족들에게 이슬람교를 포교해 나갔다.
혹독한 사막이 만들어낸 강력한 신앙
원래 유대교가 번성한 곳이었던 메디나는 이슬람의 일신교 신앙을 받아들이기 쉬운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마호메트는 이곳에서 적극적으로 포교해 나갔다. 그는 또한 당시 메디나에서 일어난 내분을 해결함으로써 군사적으로도 신망을 얻었다. 이리하여 그는 메디나에서 정교일치의 이슬람 교단을 수립하는 데 성공했다.
630년 1월에 마호메트는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메카를 포위했다. 다행히 그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메카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며 카바 신전에 놓여 있던 몇몇 우상들을 파괴하고 그곳을 이슬람교의 성당으로 만들었다.
현재 카바 신전은 메카의 모스크(이슬람교의 예배소) 중앙에 위치해 있다. 신전은 석조 높이 15미터의 입방체 건물로서 코란의 말씀을 자수로 수놓은 검은 천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동쪽의 벽 밑에는 우상숭배가 금지되어 이전에 신성시되었던 검은 돌이 박혀 있었다. 이슬람력으로 12월에는 지금도 전 세계로부터 많은 이슬람교 순례자들이 이곳에 모여든다.
코란은 전체 11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슬람의 세계관, 신조, 윤리, 행위, 규범 등이 아라비아어의 산문시체로 서술되어 있다. 코란에 담긴 마호메트의 가르침에 대해 기번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마호메트의 가르침은 매우 단순명료하다. 즉, '오르는 자는 침몰하고, 태어나는 자는 죽으며 썩어야 할 것은 썩는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는 이 사상을 기초로 인간이든 우상이든, 별이든 달이든 간에 이에 대한 숭배를 철저하게 배척했다. 그리고 우주의 창조주만이 시공을 초월하거나 가치관에 좌우되지 않는 존재라고 하여 이를 숭배한 것이다."
풍토와 종교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슬람교를 비롯하여 혹독한 사막에서 발생한 종교 가운데는 일신교가 많다. 그에 비해 풍요로운 땅에서 발생한 종교에는 다신교가 많다. 가혹한 환경에서는 절대유일의 신밖에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가르침에 따라 우상숭배가 일제히 금지됨으로써 지금까지 행해져 왔던 산 제물 의식이 폐지되었고 기도와 단식, 그리고 회사로 대체되었다. 복수를 금기시하고 우애와 자선의 정신을 가장 귀중한 가치로 삼았으며 과부와 고아, 그리고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코란 아래 하나로 결집된 중동 세력
이렇게 단결된 이슬람 세력은 동서로 확장되어 나갔다. 제일 먼저 그들은 로마 제국이 약체화된 것에 편승하여 시리아를 손에 넣었다. 당시 시리아는 제국의 곡물 창고라 불릴 정도로 풍요로운 나라였다. 이곳을 손에 넣음으로써 이슬람 세력은 전시에 식량 부족을 해소할 수 있게 되어 더욱 세력을 강화해 나갔다.
이렇듯 동서 광역에 걸친 지배로 인해 이슬람 문화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역대 지배자들은 오리엔트 특유의 학문뿐만 아니라 먼 나라들로부터 들어온 지식에도 강한 관심을 보였으며 이를 흡수하여 자신들의 문화와 지식으로 융화시켜 나갔다.
지혜의 관아바스 왕조 시대에 창설되어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을 아라비아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한 학술기관.
코란은 단순히 경전의 의미뿐 아니라 정치, 경제, 법률, 나아가서 인간의 행동이나 본질을 다룬 책이다. 코란의 가르침 아래 서로 적대시해 왔던 중동의 부족들이 단결하게 되었고 그때까지 불필요한 내부 항쟁으로 낭비되었던 에너지가 하나로 결집되어 모두 외부로 향하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이슬람이 순식간에 세력을 확장해 나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이 포인트에 서술이 딸린 인물·집단이 17이라, 관계가 많이 얽힌 13만 옆에 세웠습니다. 나머지는 본문 링크로 있습니다.
이 포인트의 지도
스크롤을 따라 지도가 움직여요지명 26곳. 이름을 누르면 그 화면으로 갑니다. 테두리만 있는 점은 위치가 추정입니다.- 인물 — 기번, 마호메트, 아부 바크르, 아브 탈리브, 아브드 알 무탈리브, 유스티니아누스, 하디자, 하심
- 지명 — 그리스, 나르본느, 로마, 로마 제국, 메디나, 메카, 바그다드, 바르셀로나, 베지에, 북아프리카, 사산조 페르시아, 세비야, 시리아, 아그드, 아프리카, 에스파냐, 오리엔트, 이집트, 이탈리아, 인도, 중동, 지중해, 카바 신전, 톨레도, 툴루즈, 페르시아
- 사건 — 르네상스 운동, 히즈라
- 시대 —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사산조 페르시아
- 집단 — 고트족, 그리스, 기독교, 사산조 페르시아, 아바스 왕조, 이슬람 세력
- 제도 — 기독교, 유대교, 칼리프
- 저작 — 지혜의 관, 코란
여기 나온 인물·지명을 표 한 장으로 받아 시트에 붙여넣을 수 있습니다.
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사람을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 한 명이고, 괄호 안은 소속이나 시대 같은 구분자입니다. 검색하거나 발표 자료에 옮기실 때는 괄호까지 통째로 이름으로 쓰셔야 동명이인과 안 섞입니다.
아닙니다. 사진과 연대는 우리 자료가 아니라 위키미디어·위키데이터에서 따로 받아온 것이라 사람마다 있고 없고가 갈립니다. 인물 262명 중 사진은 164명, 생몰 연대는 168명에게 있습니다. 없는 자리는 지어내지 않고 비워 둡니다.이어서 About
전부 띄우면 오히려 못 읽어서입니다. 한 포인트에 평균 47명이 나오는데 문단은 40개뿐이라, 다 세우면 문단마다 카드가 붙습니다. 지명은 지도가 맡고, 나머지는 그 포인트에서 관계가 많이 얽힌 순으로 한 포인트에 열네 장까지만 세웁니다. 몇 중 몇을 세웠는지는 본문 아래에 적어 둡니다.이어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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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으로 꺼 뒀습니다. 지역·바다·강도 좌표가 점 하나뿐인데 그 점이 대개 그 지역 대표 도시 위라, 켜면 도시 이름을 가립니다. 실제로 「아프리카」는 「카르타고」에서 300m 떨어져 있고 「카파도키아」와 「카이사레아」는 좌표가 아예 같습니다. 끄면 두 지명이 12픽셀 안에 뭉치는 포인트가 30개 중 29개에서 8개로 줄어듭니다. 「읽기 설정 · 지도에 그릴 것」에서 켜실 수 있습니다.이어서 읽기
그 자리에 지명이 셋 있는데 너무 가까워 한 점으로 묶었다는 뜻입니다. 성소피아성당은 비잔티움에서 20미터 거리라 따로 찍으면 점이 통째로 포개져 아래 것을 누를 수 없습니다. 점 위에 마우스를 올리면 묶인 이름이 다 나옵니다. 30개 포인트에서 65곳이 이렇게 묶입니다.이어서 읽기
이 화면 밖에 있는 지명입니다. 지도는 그 포인트의 도시들이 잘 보이도록 범위를 잡는데, 그러다 보면 멀리 있는 지역이 화면을 벗어납니다. 안 그리면 본문에서 그 이름에 마우스를 올려도 아무 일이 안 일어나므로, 「저 바깥 이 방향」이라는 뜻으로 테두리에 붙여 둡니다. 정확한 자리가 아니라서 이름표는 달지 않습니다.
포인트 한 장이 약 1만 자, 5천 토큰입니다. 어느 AI 창에도 그냥 들어갑니다. 잘라 붙이실 필요가 없습니다.이어서 AI에 줄 자료
있습니다. 포인트 01·02 본문 45건을 사료와 대조해 심각한 오류 6건을 찾았습니다. 전투 승패가 뒤집힌 서술이 두 장에 하나꼴이었습니다.이어서 그냥 시키면 틀리는 것 · About
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이어서 그냥 시키면 틀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