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 17

가공할 만한 적과의 전투

30포인트 편역본
데키우스 황제는 정권 내에 움트는 악을 없애기보다 고트족에게 승리하는 쪽이 더 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쉬운 일을 행하던 중 그는 군과 자신의 생명을 잃고 말았다.
고트족침입자게르만계 유목민족. 문맹 야만족으로 취급받았으나 백병전에 능했고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문맹의 고트족 이동기

데키우스황제 · 201~251로마 황제. 고트족의 침입에 대응하려다 늪지대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 시체를 찾지 못했다.
로마 제국의 쇠망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고트족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트족은 게르만계의 한 부족으로 발상지는 스칸디나비아 반도 남부(지금의 스웨덴 남단)로 주정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전설로 전해지는 이야기에 불과하며 유감스럽게도 신빙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로마 시대 초기에 고트족은 오데르 강 일대에 살고 있었으며 체형이나 습속 등에서 반달족과 공통된 점이 발견되므로 오늘날 독일 평원지역에 살았던 고급민족으로 볼 수 있다.
반달족집단게르만계 민족. 고트족과 같은 조상, 종교, 언어를 공유했다.
당시 야만족으로 간주되었던 고트족은 로마인들에게 두려움과 동시에 경멸의 대상이었다. 당시 고트족은 문맹족이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그들을 논밭을 가는 데 이용되는 소와 같이 취급했다. 그런만큼 그들은 비참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트족이 질박하고 순수하며 강건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기번에 따르면 단순히 무지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화폐가 없었기 때문에 물물교환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물건의 가격이나 가치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 때로는 로마에서 보내진 고가의 은기도 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토기 종류와 같은 가치로 교환되곤 했다. 게다가 고트족 남자들은 게을러서 가사일과 가족 돌보기, 토지나 가축 관리는 모두 노인들이나 여자 아이, 또는 노예들이 맡았다. 남자들은 배불리 먹고 졸면서 하루하루를 무익하게 보내고 있었다.
이렇듯 야만스럽기 그지없는 고트족에게 당시 세계 최대의 번영국 로마 제국이 혼쭐이 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고트족이 역사 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서기 1년경이었다. 당시 그들은 비수아 강 유역(지금의 폴란드 바르샤바에 해당하는 내륙부)에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서쪽에는 반달족이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고트족과 반달족은 같은 조상을 가졌으며 같은 종교를 믿고 같은 언어를 사용했다.
그후 독일 북동부로 본거지를 옮긴 고트족은 세베루스(222~235 재위) 황제 시대에 종종 다키아 주(지금의 루마니아 도나우 강 하류 일대를 말한다. 북쪽의 내륙부에는 흡혈귀 드라큘라의 전설로 유명한 트란실바니아의 숲이 이어져 있으며 트라야누스 황제가 101년에 있었던 전투 끝에 입수한 땅이다. 그 전두 모습은 트라야누스 황제가 직접 기록해서 남긴 『다키아 전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를 침략했다. 이때부터 약 70년간을 기번은 '고트족이 발트해에서 흑해로 옮겨간 제2차 이동기'라 부르고 있다.
트라야누스황제 · 53~117로마 황제. 106년 다키아를 정복했고 마르키아노폴리스 도시를 설립했다.
사실 고트족이 왜 이 시기에 이동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역병, 기아, 신탁, 또는 지도자의 한마디로도 그들은 간단히 이동을 시작했을 것이다. 여하튼 남방은 따뜻하고 풍요로운 곳이었으니 말이다.
제2차 이동기사건고트족이 발트해에서 흑해로 옮겨간 대규모 이동. 세베루스 황제 시대에 시작.
그들은 폴란드와 러시아의 평원을 꾸불꾸불 돌아 흐르는 큰 강을 따라 전진했다. 엄청난 수의 가축들을 이끌고 이동했기 때문에 필히 강을 따라 가야 했다.
세베루스황제로마 황제. 고트족이 다키아를 처음 침략한 시대의 황제.

고트족으로 전향한 로마 병사들

고트족은 적에 맞서 칼, 창, 총검 등으로 싸우는 백병전에 능했다. 또한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은 어느 부족보다도 강하여 전투 시에는 대단한 결속력으로 평소 이상의 전투력을 발휘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방을 점령했다.
북방에 살고 있던 그들에게 이곳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땅이었다. 울창하고 거대한 떡갈나무 숲이 있었고 귀중한 교역 물자가 되는 벌집이 있었다. 강과 그 주변에는 무수한 짐승들과 물고기가 살고 있어 가축들은 통통하게 살지고 그 땅의 온난한 기후는 어떤 곡물도 잘 여물게 했다. 보통 이 정도 조건이면 그 땅에 정착해 살게 마련인데 고트족은 우크라이나에 머물지 않고 여전히 계속 이동하면서 약탈을 일삼았다.
그 다음으로 고트족이 눈독을 들인 곳이 로마 제국의 영토인 다키아 주였다. 다키아 평원의 풍요로운 작물들은 그들의 눈에 마치 '빨리 저를 베어주세요'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그곳의 수비 상태는 취약하기 그지없었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키아 지방을 정복(106년)한 후부터 역대 황제들은 이 지역을 계속 지배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 지역에서 거두어들이는 세수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로마의 국위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자연히 방위는 소홀했다.
고트족이 공격해 오면 로마 군 수비대는 서둘러 자신들의 담당 구역을 버리고 패주했다. 뿐만 아니라 주요 거점을 야만족에게 내준 것에 대해 문책당할 것이 두려워 고트족과 내통하여 그들의 군대에 합세했다. 덕분에 고트족은 한번도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무사히 도나우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로마 군집단로마 제국의 군대. 고트족 앞에서 처음으로 패주했고 많은 병사들이 고트족에 귀순했다.
드디어 그들은 마르키아노폴리스(흑해 연안)의 성벽 아래까지 이르렀다. 참고로 이곳은 예전에 트라야누스 황제가 여동생의 이름 마르키아나의 이름을 본따 만든 도시였다.
유복한 시민들은 고트족에게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그들은 그 돈을 받자마자 곧바로 공격을 중단하고 사막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7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또다시 도나우 강을 건너 모이시아(유고슬라비아 동남부와 불가리아 북부, 도나우강 하류) 속주의 도시를 약탈하며 돌아다녔던 것이다.

늪지대 속으로 사라진 데키우스

이들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로마 황제가 이끄는 군대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로마로 사자를 보냈다.
250년에 고트족은 니코폴리스(트라야누스 황제가 조성한 도시 중 하나)를 포위하고 있었는데 데키우스(249~251 재위) 황제가 군대를 이끌고 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거리의 포위망을 뚫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데키우스 황제는 적이 도망친 것으로 판단하여 험한 길을 강행군하여 고트족을 추격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다. 아직 적들과는 꽤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 지점에서 로마 군은 고트족으로부터 맹공격을 받았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로마 군은 파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황제는 가까스로 도망을 갔다. 근대화된 무기조차 지니지 못한 야만족 앞에서 로마 황제가 패주한 것은 제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로마 군을 격퇴시킨 고트족은 필리포폴리스(필리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가 발칸 산맥 근처에 만든 트라키아의 수도)로 침공해 들어갔다. 필리포폴리스는 고립무원 상태였지만 시민들은 성 안에서 장기간 동안 견뎌냈다. 그러나 아무리 난공불락의 성이라 해도 7만 군대의 공격을 받고 건재할 수 없었다. 성안으로 몰려든 고트족들은 금품을 약탈했고 10만 시민이 그들에 의해 학살되었다. 살아남은 시민들은 값비싼 전리품으로서 포로가 되었다. 고트족에게 완전히 장악당한 신전 안에서는 전 황제 필리푸스의 동생 프리스쿠스가 국가의 적인 야만족의 비호 아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황제의 옷인 자의를 승낙하기에 이르렀다.
필리푸스황제 · 204~249로마 황제. 니코폴리스 건설과 관련된 인물이며 그의 동생 프리스쿠스는 필리포폴리스에서 항복했다.
한편 고트족이 필리포폴리스 공략에 열중하는 동안 데키우스 황제의 군대는 전의를 회복하고 신병을 모아 태세를 정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트족이 이긴 것을 보고 쳐들어온 카르피족을 맞아 격파했다. 데키우스 황제는 산악지대의 수비를 심복 장군에게 맡기고 자신은 고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도나우 호반에 있는 요새를 수복하고 보강하여 경계망을 조성하는 데 만전을 기했다.
프리스쿠스왕자전 황제 필리푸스의 동생. 필리포폴리스 함락 후 고트족의 비호 아래 자의를 입었다.
한편 고트족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로마 군에게 포위된 채 추격당하고 있었다. 고트족이 자랑하는 정예부대는 장기간에 걸쳐 치러진 필리포폴리스 시 공략전으로 전력을 거의 다 소진한 상태였다. 게다가 장기간의 전투로 7만 대군을 충당할 식량도 부족했다.
카르피족집단야만족. 고트족이 필리포폴리스를 점령한 후 로마를 침입했다.
로마 군의 승리는 확실해 보였다. "뭐니 뭐니 해도 상대는 야만족이다. 무적의 로마 군이 만전의 태세로 싸운다면 하찮은 상대에 불과할 뿐이다"라며 데키우스 황제는 확신에 차 있었다. 황제는 고트족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가해 자신과 로마 군의 위신을 만회하려고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유목민인 고트족은 필리포폴리스를 계속 지배할 마음은 애당초 없었다. 로마 군에게 포위된 그들은 '안전만 보장받는다면 전리품과 포로를 놓아주고 철수할 뜻을 전해왔다.
그러나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데키우스 황제는 고트족이 제의하는 화의 조건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황제는 그들을 철퇴함으로써 다른 야만족에게 본보기를 보여주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은 잘못된 결과를 초래했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는 속담이 있듯이 바싹 추격당한 고트족이 로마 군에게 사나운 송곳니를 들이댄 것이다. 전투가 시작된 곳은 포룸 테레브로니라는 모이시아 속주 교외의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로마 군에게 불길한 사건이 일어났다. 장래가 촉망되던 데키우스 황제의 장남이 하필이면 황제가 보는 앞에서 적의 화살에 맞아 쓰러진 것이다.
"일개 병사의 죽음에 불과하다. 로마 제국의 군대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데키우스 황제는 도망치려는 병사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장렬한 사투가 펼쳐지는 가운데 드디어 고트족의 제1진이 전멸했다. 그리고 구원군으로 달려온 제2진도 같은 운명을 겪었다. 남은 것은 제3진뿐이었는데 그들은 습지대 뒤에서 수비를 강화한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로마 군은 그들이 나오게끔 하지 않고 무모하게도 습지대로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고트족은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거운 갑옷과 투구를 착용한 로마 군 병사들은 앞으로 전진할 때마다 발이 푹푹 빠져들어갔다.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된 상태에서는 투창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습지대 전투에 익숙해 있던 고트족은 긴 창으로 닥치는 대로 로마 군 병사를 찔러댔다. 데키우스 황제 역시 이 늪에서 목숨을 잃었다. 습지대에는 여러 구의 시체가 이리저리 나뒹굴었는데, 그 속에서 데키우스 황제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향년 50세로 황제는 세상을 떠났다. 고대도의 귀감이라고 할 만한 명군이었던 데키우스 황제는 그만 자신의 교만함으로 인해 장남과 함께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늪지대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야만족과의 굴욕적인 조약

이 역사적인 패배로 인해 로마 군은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주도권을 잡으려 했던 종래의 태도와 달리 황위 계승 문제에도 관여하지 않고 원로원 한 사람 한 사람의 결의를 침묵으로 따랐다. 그 결과 제위는 데키우스 황제의 아들 호스틸리아누스에게 주어졌으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모이시아 지방의 총독인 갈루스와 공동으로 통치하는 공치황제가 되었다.
갈루스황제로마 황제. 어린 호스틸리아누스와 공동 통치했으나 고트족과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했고 민중의 비난을 받았다.
어린 황제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일은 고트족에게 빼앗긴 영지를 되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린 황제는 전쟁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에게 온갖 편의를 제공해 주는 조건으로 자국 영토에서 떠나게 했다. 약탈한 재물과 로마인 포로의 반환도 요구하지 않았고 심지어 앞으로 로마 제국 영토 내에 침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매년 거금의 돈을 지불하겠다고까지 했다.
호스틸리아누스황제 · 230~251데키우스의 아들.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어 갈루스와 공동 통치했으나 고트족과의 전쟁을 거부했다.
이제껏 이와 같은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한 적이 없었던 민중은 야만족과 주고받은 이 조약을 제국의 수치로 여기며 젊은 황제를 경멸했다. 그러던 중 황제가 병으로 갑자기 타계하자 비난의 화살은 새로 즉위한 갈루스(251~253 재위) 황제에게 향했다. 민중은 로마가 고트족에게 패한 것은 갈루스 황제의 배신 때문이라고 속삭였다. 뿐만 아니라 어린 황제의 죽음조차도 그의 소행이라고 여겼다.
원로원통치 기구로마 제국의 최고 의결기관. 갈루스의 죽음 후 아이밀리아누스를 황제로 정식 승인했다.
조약에 의해 제국이 향유한 평화까지도 제국민의 불안을 부추겼다. 전쟁의 두려움이 사라진 상황에서 평화의 대상이 된 제국의 불명예가 이전보다 더욱 불쾌하게 여겨졌다. 게다가 불명예의 대가로 얻어진 평화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제국의 힘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고 지금까지 얌전하게 있던 다른 야만족들까지 로마를 침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갈루스 황제는 자신이 나서지 않고 주지사인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야만족 토벌을 맡겼다. 아이밀리아누스는 앞선 전쟁에서의 대패로 뿔뿔이 흩어진 병사들을 다시 불러들여서 전쟁에서 이기면 고트족에게서 빼앗은 금품을 보너스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시들어가던 병사들의 사기를 다시 북돋웠다.
아이밀리아누스총독 · 207~253모이시아 지방의 총독. 갈루스의 명령으로 고트족을 격퇴했고 부하들에게 추대되어 황제가 되었으나 4개월 후 살해되었다.
그들은 방심하고 있던 야만족 군을 불시에 습격했고 도나우 강의 대안까지 도망치는 적을 추격했다. 아이밀리아누스는 약속대로 야만족으로부터 빼앗은 금은보화를 모든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하여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그를 황제로 추대한다!"고 선언했다.
갈루스 황제는 로마 시민의 복지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주지육림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그에게 아이밀리아누스의 승리와 모반, 그리고 로마로의 급진격이라는 보고가 전해졌다. 이에 놀란 황제는 마지못해 스폴레토(고대의 스폴레티움, 이탈리아 중부) 평원까지 군대를 진격시켰다. 그런데 여기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위풍당당한 적장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황제군의 장교들은 갈루스 황제에 대한 경멸감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군대로 오면 급료를 대폭 올려주겠다'라는 아이밀리아누스의 제의가 전해졌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갈루스 황제와 그의 아들은 전향한 황제군 측 병사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이 내란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종결되었다. 그리고 원로원은 전승자인 아이밀리아누스를 황제로 정식 승인했다.
그러나 아이밀리아누스 황제도 불과 4개월 후에 자신의 부하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데키우스 황제가 고트족을 토벌하기 위해 모이시아 속주에 도착한 지 3년 만에 황제 네 명이 죽은 것이다. 고트족이 직접 실해한 것은 데키우스 황제 한 사람이었지만 고트족은 로마 제국을 혼란과 멸망의 길로 이끄는 계기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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