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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등장 이전의 혼란
주변 민족과 노예들의 반란이 잦았던 이유는 무엇인가30포인트 편역본
오래전에 노예에게 특별한 복장을 입혀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자는 제안이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노예에게 동료들의 숫자를 헤아리게 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반대에 부딪혔다. _기번
거듭되는 집정관의 공포 정치
킴브리기원전 115년 테우토네스와 함께 라인 강을 넘어 남하하여 로마 병사 12만 명을 전멸시킨 부족.
테우토네스킴브리와 함께 라인 강을 넘어 남하하여 로마에 큰 위협이 되었던 부족으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에스파냐를 약탈했다.
마리우스는 두 번의 전투에서 갈리아 군을 격파했다. 개선을 한 마리우스는 어마어마한 전리품과 영토를 얻은 후에 일단 철수했다. 그러나 지방민의 반란을 진압하는 '대망의 영웅'으로 불리게 되면서 그는 군단을 편성하여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살육으로 뒤덮는 처참한 탄압을 자행했다.
킨나마리우스와 손을 잡아 로마에서 공포 정치를 벌인 집정관으로, 후에 그리스에서 아군 병사에게 살해당했다.
마리우스와 킨나가 집정관으로 취임하고서부터 1년간에 걸쳐 잔인한 공포 정치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노예들의 약탈과 폭행, 방화는 극단으로 치달았고 길거리에는 독수리와 들개 무리들이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마구 뜯어 먹고 있었다.
이 처참한 정세 속에서 영광스러운 영웅 마리우스가 죽고 후임 집정관인 플라쿠스는 즉시 병사 1만 2천 명을 이끌고 술라의 군대를 토벌하기 위해 출정했기 때문에 사실상 로마는 킨나가 독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플라쿠스는 술라의 파면장을 가지고 그리스에 도착하자마자 상대의 교묘한 전략에 말려들고 말았다. 당황한 킨나가 전선을 지휘하기 위해 그리스로 달려갔지만 그 역시 아군 병사에게 살해당했다.
한편 로마는 마리우스를 수령으로 하는 민중파가 지배하게 되면서 술라를 국적 박탈자로 선언하고 토벌군을 파견했지만 거의 모든 귀족들은 로마에서 탈출하여 술라의 군대에 가담했다. 그중에는 나중에 카이사르와 손잡고 로마를 지배하게 되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도 있었다. 술라를 지지하는 귀족군과 민중파 군대가 결전을 벌인 끝에 민중파 군이 참패했다.
개선을 한 술라는 마리우스파의 원로원 의원 40명과 기사 2600명을 사형에 처하고 도망간 정치범에게는 고액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그 수배 대상자 가운데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청년이 있었다. 카이사르는 친구들의 필사적인 도움으로 겨우 사형을 면한 채 추방되었다. 술라는 그 판결문에 서명하면서 "나는 지금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애송이는 마리우스보다 열 배나 더 큰 힘을 가진 자이거늘!"이라고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술라의 정책은 무능한 평민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귀족들의 축재를 부추기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모든 귀족은 앞을 다투어 속주 정부의 관직을 샀다. 1년만 부임해서 일하면 세금 착복, 약탈, 원주민 노예 매매 등으로 수많은 재산을 축재할 수 있었다.
일확천금을 벌어들일 수 있었던 직책은 군사령관이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오리엔트의 여러 지역들, 그리스의 신상과 예술품을 전리품으로 가지고 돌아오면 로마의 골동품 상인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와 그것을 사들였다.
이러한 정세의 흐름을 타고 카이사르도 에스파냐 속주에 부임하여 2500만 세스테르티우스(은화 단위로서 1세스테르티우스는 약 3200원에 해당한다)나 되는 빚을 1년 안에 다 갚았다고 한다.
노예들의 반란과 격동의 시대
귀족들의 축재는 당연한 결과로 속주와 식민지의 반란과 폭동을 야기시켰다.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에스파냐를 얻었지만 그 후 1세기 이상에 걸쳐 속주 관리의 악정을 계속했으므로 로마 군 내에도 반란자가 생겨났다.
한 장교는 장군의 방식에 분개한 나머지 군을 이탈해서 타부족을 선동하여 봉기를 촉구하고, 군단을 조직해서 8년에 걸쳐 로마 군을 계속 이겨 그 속주를 통치하기도 했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카푸아 시의 검투사 노예 양성소에서 78명이 탈주한 데서 시작되어 7만 명의 반란군이 로마에 위협을 주었던 사건.
능변가이면서 재능을 겸비한 스파르타쿠스는 이탈리아 반도 전역의 노예들에게 호소하여 무려 7만 명의 반란군을 조직했다. 그는 이들에게 무기 제조와 사용법을 가르쳐서 원로원이 파견한 진압군을 잇달아 물리쳤다.
종국에는 패배를 면치 못할 것을 예상한 스파르타쿠스는 군대를 알프스 너머로 이동시키고 전원 귀향하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동료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서 약탈을 계속했기 때문에 노략질 행위에는 반대했던 스파르타쿠스도 어쩔 수 없이 정부군과 맞서야 했다.
마침내 그들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노예들이 그들에게 호응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이탈리아 전역에 퍼져 있는 백만의 노예가 스파르타쿠스 편으로 집결하면 영원의 도시 로마는 폐허가 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장군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로마로 귀환했지만 원로원은 개선식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군을 해산하지 않고 로마 근교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마리우스 이래로 형성된 민중파가 상류층 자산계급(부르주아) 출신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대대적으로 지지하여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집정관이 된 두 사람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호민관 권한의 복구, 귀족의 배심권 독점 철폐였다. 또 폼페이우스는 동방(소아시아·오리엔트) 작전과 지중해의 해적 소탕 함대의 지휘권(육해 전군 장악)을 요구했다.
민회는 키케로의 지도 아래 만장일치로 신임 집정관을 지지했다. 한편 원로원은 한 사람을 제외한 전원이 이에 반대했다. 원로원에서 홀로 다른 목소리를 낸 것은 무명의 청년 귀족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로마 시민의 힘으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승리했다.
그런데 민중파 가운데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자가 나타났다. 카틸리나라는 귀족 출신의 이 남자의 언동은 광기를 머금고 있었다. 신전에서 봉사하는 무녀를 범한 혐의로 고소되었는데 그 무녀는 바로 키케로의 처제였다. 그는 상류사회에서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아 따돌림을 당하는 신세였던 것이다.
그 때문이었는지 그는 귀족 출신이면서도 극단적인 민중파였고 '전 시민의 모든 빚 즉시 탕감'이라는 급진적인 강령을 주장하며 무려한 400명을 모아 암살단을 구성하여 쿠데타를 기도했다.
카틸리나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지지한 로마 시민의 반원로원 운동과 같은 지지를 얻고 싶어했으나 부르주아는 한 명도 움직이지 않았고 그에게 대항하여 집정관으로 입후보한 키케로를 귀족들과 함께 지지하여 당선시켰다.
낙선한 카틸리나는 동지 수천 명을 이끌고 키케로의 암살을 시도했지만 거꾸로 격퇴당하고 말았다. 키케로는 그를 원로원에 고발하고 재판에서 3일간에 걸쳐 변론을 펼쳐 체포시키고 카틸리나 반란군의 사형을 요구했다.
그러나 오직 카이사르만이 키케로의 요구에 반대하며 "금고형에 처하라!"고 외치면서 역사에 길이 남을 키케로의 화려하고 장황한 연설에 대해 간결한 변론으로 민중파를 옹호했다.
이때 집정관 마리우스 안토니우스(후에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로마에 대항하는 안토니우스의 아버지)는 토스카나로 도망친 카틸리나 반란군을 피스토이아 근교에서 전멸시켰다.
이 포인트에 서술이 딸린 인물·집단이 15이라, 관계가 많이 얽힌 12만 옆에 세웠습니다. 나머지는 본문 링크로 있습니다.
이 포인트의 지도
스크롤을 따라 지도가 움직여요지명 26곳. 이름을 누르면 그 화면으로 갑니다. 테두리만 있는 점은 위치가 추정입니다.- 인물 — 가이우스 마리우스, 기번, 마리우스 안토니우스, 술라, 스파르타쿠스, 카이사르, 카틸리나, 크라수스, 클레오파트라 7세, 클로디우스, 키케로, 킨나, 폼페이우스
- 지명 — 갈리아, 그리스, 독일, 라인 강, 로마, 발칸, 발칸 반도, 소아시아, 시칠리아, 아프리카, 알프스, 에스파냐, 오리엔트, 이탈리아, 이탈리아 반도, 지중해, 카르타고, 카푸아, 킬리키아, 터키, 트라키아
- 사건 —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십자가형, 제2차 포에니 전쟁, 카틸리나 사건
- 집단 — 검투사, 그리스, 로마 군, 로마 시민, 민중파, 원로원, 킴브리, 테우토네스
- 저작 — 아피아 가도
여기 나온 인물·지명을 표 한 장으로 받아 시트에 붙여넣을 수 있습니다.
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사람을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 한 명이고, 괄호 안은 소속이나 시대 같은 구분자입니다. 검색하거나 발표 자료에 옮기실 때는 괄호까지 통째로 이름으로 쓰셔야 동명이인과 안 섞입니다.
아닙니다. 사진과 연대는 우리 자료가 아니라 위키미디어·위키데이터에서 따로 받아온 것이라 사람마다 있고 없고가 갈립니다. 인물 262명 중 사진은 164명, 생몰 연대는 168명에게 있습니다. 없는 자리는 지어내지 않고 비워 둡니다.이어서 About
전부 띄우면 오히려 못 읽어서입니다. 한 포인트에 평균 47명이 나오는데 문단은 40개뿐이라, 다 세우면 문단마다 카드가 붙습니다. 지명은 지도가 맡고, 나머지는 그 포인트에서 관계가 많이 얽힌 순으로 한 포인트에 열네 장까지만 세웁니다. 몇 중 몇을 세웠는지는 본문 아래에 적어 둡니다.이어서 읽기
지명에 마우스를 올리면 오른쪽 아래에 그 포인트의 지도가 뜨고 그 자리가 켜집니다. 키보드로 옮겨도 같습니다. 지도를 위나 아래에 붙박이로 두면 읽는 동안 화면 밖으로 나가거나 다 읽고 나서야 보여서, 물을 때만 답하도록 했습니다. 「읽기 설정」에서 오른쪽 붙박이·본문 아래로 바꾸거나 끌 수 있습니다.이어서 읽기
기본으로 꺼 뒀습니다. 지역·바다·강도 좌표가 점 하나뿐인데 그 점이 대개 그 지역 대표 도시 위라, 켜면 도시 이름을 가립니다. 실제로 「아프리카」는 「카르타고」에서 300m 떨어져 있고 「카파도키아」와 「카이사레아」는 좌표가 아예 같습니다. 끄면 두 지명이 12픽셀 안에 뭉치는 포인트가 30개 중 29개에서 8개로 줄어듭니다. 「읽기 설정 · 지도에 그릴 것」에서 켜실 수 있습니다.이어서 읽기
그 자리에 지명이 셋 있는데 너무 가까워 한 점으로 묶었다는 뜻입니다. 성소피아성당은 비잔티움에서 20미터 거리라 따로 찍으면 점이 통째로 포개져 아래 것을 누를 수 없습니다. 점 위에 마우스를 올리면 묶인 이름이 다 나옵니다. 30개 포인트에서 65곳이 이렇게 묶입니다.이어서 읽기
이 화면 밖에 있는 지명입니다. 지도는 그 포인트의 도시들이 잘 보이도록 범위를 잡는데, 그러다 보면 멀리 있는 지역이 화면을 벗어납니다. 안 그리면 본문에서 그 이름에 마우스를 올려도 아무 일이 안 일어나므로, 「저 바깥 이 방향」이라는 뜻으로 테두리에 붙여 둡니다. 정확한 자리가 아니라서 이름표는 달지 않습니다.
포인트 한 장이 약 1만 자, 5천 토큰입니다. 어느 AI 창에도 그냥 들어갑니다. 잘라 붙이실 필요가 없습니다.이어서 AI에 줄 자료
있습니다. 포인트 01·02 본문 45건을 사료와 대조해 심각한 오류 6건을 찾았습니다. 전투 승패가 뒤집힌 서술이 두 장에 하나꼴이었습니다.이어서 그냥 시키면 틀리는 것 · About
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이어서 그냥 시키면 틀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