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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등장 이전의 혼란
주변 민족과 노예들의 반란이 잦았던 이유는 무엇인가30포인트 편역본
오래전에 노예에게 특별한 복장을 입혀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자는 제안이 나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노예에게 동료들의 숫자를 헤아리게 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반대에 부딪혔다. _기번
거듭되는 집정관의 공포 정치
기원전 115년에 킴브리와 테우토네스(테우토니, 튜튼) 두 부족이 전례 없는 군세를 이루어 게르만(지금의 독일) 지역에서 라인 강을 넘어 남하하여 로마 병사 12만 명을 전멸시켰다. 그러나 이 갈리아 군이 곧장 로마로 향하지 않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에스파냐를 약탈했기 때문에 로마 군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
그로부터 3년 후에 갈리아 군이 또다시 이탈리아 반도로 진군했을 때 로마의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국민군을 편성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이 마리우스는 카이사르의 고모부였다. 즉, 마리우스의 아내의 조카가 카이사르였던 것이다.
마리우스는 두 번의 전투에서 갈리아 군을 격파했다. 개선을 한 마리우스는 어마어마한 전리품과 영토를 얻은 후에 일단 철수했다. 그러나 지방민의 반란을 진압하는 '대망의 영웅'으로 불리게 되면서 그는 군단을 편성하여 이탈리아 반도 전역을 살육으로 뒤덮는 처참한 탄압을 자행했다.
다음해 로마에서는 내란이 일어났다. 마리우스의 전 부관이었던 술라는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원정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시민의 지지도가 높았던 노령의 마리우스와 격렬하게 대립하게 되자 군대를 로마 시내로 돌진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달아나야 했다.
그러나 그 후 다시 한 번 내전이 일어났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마리우스는 서둘러 아프리카를 출발했다. 그는 다 떨어져 너덜너덜해진 옷과 구두를 신고 머리는 산발한 채로 며칠 사이에 병사 6천 명을 모아 역시 도망가 있던 후배 집정관 코르넬리우스 킨나와 합류하여 무방비 상태의 로마로 몰려갔다. 로마에 도착한 마리우스는 원로원 의원들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술라를 파면한 후 수천 명의 귀족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마리우스와 킨나가 집정관으로 취임하고서부터 1년간에 걸쳐 잔인한 공포 정치가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노예들의 약탈과 폭행, 방화는 극단으로 치달았고 길거리에는 독수리와 들개 무리들이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마구 뜯어 먹고 있었다.
이 처참한 정세 속에서 영광스러운 영웅 마리우스가 죽고 후임 집정관인 플라쿠스는 즉시 병사 1만 2천 명을 이끌고 술라의 군대를 토벌하기 위해 출정했기 때문에 사실상 로마는 킨나가 독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플라쿠스는 술라의 파면장을 가지고 그리스에 도착하자마자 상대의 교묘한 전략에 말려들고 말았다. 당황한 킨나가 전선을 지휘하기 위해 그리스로 달려갔지만 그 역시 아군 병사에게 살해당했다.
한편 로마는 마리우스를 수령으로 하는 민중파가 지배하게 되면서 술라를 국적 박탈자로 선언하고 토벌군을 파견했지만 거의 모든 귀족들은 로마에서 탈출하여 술라의 군대에 가담했다. 그중에는 나중에 카이사르와 손잡고 로마를 지배하게 되는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도 있었다. 술라를 지지하는 귀족군과 민중파 군대가 결전을 벌인 끝에 민중파 군이 참패했다.
개선을 한 술라는 마리우스파의 원로원 의원 40명과 기사 2600명을 사형에 처하고 도망간 정치범에게는 고액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그 수배 대상자 가운데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청년이 있었다. 카이사르는 친구들의 필사적인 도움으로 겨우 사형을 면한 채 추방되었다. 술라는 그 판결문에 서명하면서 "나는 지금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애송이는 마리우스보다 열 배나 더 큰 힘을 가진 자이거늘!"이라고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술라의 정책은 무능한 평민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귀족들의 축재를 부추기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모든 귀족은 앞을 다투어 속주 정부의 관직을 샀다. 1년만 부임해서 일하면 세금 착복, 약탈, 원주민 노예 매매 등으로 수많은 재산을 축재할 수 있었다.
일확천금을 벌어들일 수 있었던 직책은 군사령관이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오리엔트의 여러 지역들, 그리스의 신상과 예술품을 전리품으로 가지고 돌아오면 로마의 골동품 상인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와 그것을 사들였다.
장군 폼페이우스는 동방 원정에서 얻은 전리품 중 3분의 1을 국고에 환수하고 나머지 3분의 2를 자신의 금고에 넣어두었다. 나중에 철학자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는 젊은 변호사 키케로는 킬리키아에 부임했을 때 사재를 조금밖에 증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렴결백한 선비'로 칭송되었고 그 스스로도 그 사실을 널리 유포시켰다.
이러한 정세의 흐름을 타고 카이사르도 에스파냐 속주에 부임하여 2500만 세스테르티우스(은화 단위로서 1세스테르티우스는 약 3200원에 해당한다)나 되는 빚을 1년 안에 다 갚았다고 한다.
노예들의 반란과 격동의 시대
귀족들의 축재는 당연한 결과로 속주와 식민지의 반란과 폭동을 야기시켰다.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에스파냐를 얻었지만 그 후 1세기 이상에 걸쳐 속주 관리의 악정을 계속했으므로 로마 군 내에도 반란자가 생겨났다.
한 장교는 장군의 방식에 분개한 나머지 군을 이탈해서 타부족을 선동하여 봉기를 촉구하고, 군단을 조직해서 8년에 걸쳐 로마 군을 계속 이겨 그 속주를 통치하기도 했다.
이러한 반란은 이내 평정되긴 했지만 뒤를 이어 이탈리아 반도에는 더욱 심각한 반란이 일어났다. 카푸아 시의 검투사 노예 양성소에서 학생들이 탈주한 것이다. 학생이라고는 하나 검투사 시합에서의 죽음을 각오하고 훈련을 받던 노예 78명이 도망쳐 트라키아(트라케, 발칸 반도 남동부) 출신의 스파르타쿠스를 수령으로 추대하여 약탈을 시작했다.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영화의 소재가 되고 있는 그 유명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다.
능변가이면서 재능을 겸비한 스파르타쿠스는 이탈리아 반도 전역의 노예들에게 호소하여 무려 7만 명의 반란군을 조직했다. 그는 이들에게 무기 제조와 사용법을 가르쳐서 원로원이 파견한 진압군을 잇달아 물리쳤다.
종국에는 패배를 면치 못할 것을 예상한 스파르타쿠스는 군대를 알프스 너머로 이동시키고 전원 귀향하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동료들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서 약탈을 계속했기 때문에 노략질 행위에는 반대했던 스파르타쿠스도 어쩔 수 없이 정부군과 맞서야 했다.
마침내 그들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노예들이 그들에게 호응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이탈리아 전역에 퍼져 있는 백만의 노예가 스파르타쿠스 편으로 집결하면 영원의 도시 로마는 폐허가 되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원전 71년에 로마 시민은 술라의 부관의 아들 크라수스를 추대하여 지휘를 맡기고 또 한 명의 장군 폼페이우스와 함께 이끄는 귀족의 정예부대가 나서게 되었다. 스파르타쿠스는 이 로마 정예군과의 전면전을 피해 시칠리아 섬으로 남진하여 그곳에서 아프리카로 도망치려 했지만 격렬한 전투 끝에 전사당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반란 노예들 또한 시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숲으로 도망친 6천 명도 모두 잡히고 아피아 가도에는 십자가형을 위한 기둥이 슬비해 있었다.
두 장군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로마로 귀환했지만 원로원은 개선식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군을 해산하지 않고 로마 근교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마리우스 이래로 형성된 민중파가 상류층 자산계급(부르주아) 출신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대대적으로 지지하여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집정관이 된 두 사람이 제일 먼저 한 일은 호민관 권한의 복구, 귀족의 배심권 독점 철폐였다. 또 폼페이우스는 동방(소아시아·오리엔트) 작전과 지중해의 해적 소탕 함대의 지휘권(육해 전군 장악)을 요구했다.
민회는 키케로의 지도 아래 만장일치로 신임 집정관을 지지했다. 한편 원로원은 한 사람을 제외한 전원이 이에 반대했다. 원로원에서 홀로 다른 목소리를 낸 것은 무명의 청년 귀족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로마 시민의 힘으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승리했다.
그런데 민중파 가운데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자가 나타났다. 카틸리나라는 귀족 출신의 이 남자의 언동은 광기를 머금고 있었다. 신전에서 봉사하는 무녀를 범한 혐의로 고소되었는데 그 무녀는 바로 키케로의 처제였다. 그는 상류사회에서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아 따돌림을 당하는 신세였던 것이다.
그 때문이었는지 그는 귀족 출신이면서도 극단적인 민중파였고 '전 시민의 모든 빚 즉시 탕감'이라는 급진적인 강령을 주장하며 무려한 400명을 모아 암살단을 구성하여 쿠데타를 기도했다.
카틸리나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지지한 로마 시민의 반원로원 운동과 같은 지지를 얻고 싶어했으나 부르주아는 한 명도 움직이지 않았고 그에게 대항하여 집정관으로 입후보한 키케로를 귀족들과 함께 지지하여 당선시켰다.
낙선한 카틸리나는 동지 수천 명을 이끌고 키케로의 암살을 시도했지만 거꾸로 격퇴당하고 말았다. 키케로는 그를 원로원에 고발하고 재판에서 3일간에 걸쳐 변론을 펼쳐 체포시키고 카틸리나 반란군의 사형을 요구했다.
그러나 오직 카이사르만이 키케로의 요구에 반대하며 "금고형에 처하라!"고 외치면서 역사에 길이 남을 키케로의 화려하고 장황한 연설에 대해 간결한 변론으로 민중파를 옹호했다.
이때 집정관 마리우스 안토니우스(후에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로마에 대항하는 안토니우스의 아버지)는 토스카나로 도망친 카틸리나 반란군을 피스토이아 근교에서 전멸시켰다.
등장 객체
- 인물 — 가이우스 마리우스, 기번, 마리우스 안토니우스, 술라, 스파르타쿠스, 카이사르, 카틸리나, 크라수스, 클레오파트라 7세, 클로디우스, 키케로, 킨나, 폼페이우스
- 지명 — 갈리아, 그리스, 독일, 라인 강, 로마, 발칸, 발칸 반도, 소아시아, 시칠리아, 아프리카, 알프스, 에스파냐, 오리엔트, 이탈리아, 이탈리아 반도, 지중해, 카르타고, 카푸아, 킬리키아, 터키, 트라키아
- 사건 —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십자가형, 제2차 포에니 전쟁, 카틸리나 사건
- 집단 — 검투사, 그리스, 로마 군, 로마 시민, 민중파, 원로원, 킴브리, 테우토네스
- 저작 — 아피아 가도
이 포인트의 관계망
이 대목에 나온 관계 16건입니다. 점을 끌어 옮기고 휠로 확대할 수 있습니다.관계가 달린 것만 그립니다. 이름만 나온 인물·지명은 아래 목록에 있습니다.자주 묻는 것
다른 책입니다. 30포인트 편역본은 한국어 편역이고 원전은 기번의 영문입니다. 섞어 인용하면 사실관계가 어긋납니다. 인물·관계 자료는 편역본 계통에서만 뽑았습니다.
같은 이름이 여럿이라 가르는 표시입니다. 「율리아 (카이사르 가문)」은 가문이 아니라 율리아라는 사람입니다. 괄호를 내용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포인트 한 장이 약 1만 자, 5천 토큰입니다. 어느 AI 창에도 그냥 들어갑니다. 잘라 붙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있습니다. 포인트 01·02 본문 45건을 사료와 대조해 심각한 오류 6건을 찾았습니다. 전투 승패가 뒤집힌 서술이 두 장에 하나꼴이었습니다.
아닙니다. 사료 대조가 끝난 것은 포인트 01과 02, 둘뿐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문장 단위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데이터 기준일 2026-08-13